이 글은 원래 이 블로그 주인장이 군 생활하던 2021년 상반기, 비행단 독후감 대회가 열렸을 때 포상휴가나 한번 벌어보자는 심정하에 쓴 것이다. 다소 불순한(?) 목적을 가지고 쓴 글이긴 한데, 문서 정리하던 중 생각이 나서 좀 다듬어 올려본다. 그리고 이 글 자체가 군에 있을 때 쓴 것이기 때문에 군인이라는 부여된 정체성을 가지고 쓴 글임을 감안하고 읽기 바란다.
“도대체 세상이 어떻게 되려고 이러는지......” 우리가 주변을 둘러보면서, 뉴스를 보면서 1번쯤은 하는 말이다. 왜 세상에는 어지럽게, 온갖 막장스러운 일이 벌어지는가? 지금까지 만물의 영장으로서 모든 자연계의 강자 위에 군림해 온 ‘위대한 존재’ 인간은 왜 이렇게 멍청한 짓을 자주 벌인단 말인가? 필자는 ‘지적인 존재’의 전혀 지적이지 않은 역사를 다루는 책을 오늘 언급하고자 한다. 바로 <인간의 흑역사>이다.
<인간의 흑역사>의 저자 톰 필립스는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인류학, 사학, 과학철학을 전공하였고, 이 책에서 영미권 작가들 특유의 유머와 신랄함으로 인류의 멍청함을 꼬집는다.
필립스는 이 책에서 인간이 벌인 온갖 멍청한 행동의 역사를 몇 가지 주제에 걸쳐 언급하는데, 아이러니하게도 필립스는 첫 장에서 인간이 위대한 이유에서 인간이 사고를 치는 원인을 찾는다. 인간이 위대한 이유, 다시 말해 자연현상과 사회현상의 패턴을 읽어내고 그것을 타인에게 전달해 문화를 만드는 행위, 사고력과 창의력, 발전을 시도하고 그 아이디어를 전달하는 등 다른 동물에게서 찾을 수 없는 인간만의 특성은 인간을 위대한 존재로 만들었다. 그러나 한편으로 이러한 특성은 왜 인간이 꽤 자주 주기적으로, 그리고 매우 큰 규모로 죽을 쑤는지 설명해 준다고 필립스는 지적한다. 대표적인 이유로 저자는 인간이 손쉽게 판단을 내릴 수 있도록 하는 요령, ‘휴리스틱(heuristic)’을 제시한다. 신속한 결정을 도와주는, 인간 생존에 필수불가결한 요소인 휴리스틱은 정공법이 아닌 요령의 본질적 한계로 인해 각종 오류를 낳는다. 확증편향, 선택지지 편향, 더닝-크루거 효과, 탐욕에 기반한 소망적 사고, 부정적 외부효과 그리고 편견까지. 이 모든 것이 바로 휴리스틱에 의해 탄생한 결과이다.
*휴리스틱(heuristic): 사전적으로 휴리스틱은 다음과 같이 정의된다. ‘시간이나 정보가 불충분하여 합리적인 판단을 할 수 없거나, 굳이 체계적이고 합리적인 판단을 할 필요가 없는 상황에서 신속하게 사용하는 어림짐작의 기술’
그러한 인간의 특성 아래에서 인간은 역사상 전혀 위대하지 않은 행위를 매우 자주 벌여왔다. 그리고 필립스는 전제군주제·민주주의·식민주의·전쟁·환경문제·과학 등의 주제에 걸쳐 인류의 유구한 헛짓거리를 매우 시니컬하면서도 유머러스하게 서술한다. 이 책을 읽은 이라면 웃음을 참을 수 없으리라 장담한다. 바로 다음과 같이 생각하면서 말이다. ‘어떻게 인간이 이런 짓을 벌이고도 안 망한 거지?’ 비유하자면 ‘1000부작 국제 로케이션 블록버스터 아침드라마’와 같은, 인간의 위대하지 않은 역사를 저자는 매우 유머러스하면서도 날카롭게 꼬집는다. 예컨대, 전제군주제나 독재에 관해서는 언제부터 나서서 명령하기 좋아하는 게 취미에서 직업이 되었는지 모르겠다는 질문으로 웃음을 선사하며, 식민주의에 대해서는 매우 시니컬한 태도로 제국의 기억 윤색하기와 상상에 기반한 식민지 수혜론을 ‘개소리’에 불과하다고 하며 제국주의자들의 폐부를 찌른다. 이 책이 나올 당시가 하노이 북미정상회담 당시였으니까, 만약 이 책이 2년 정도만 더 늦게 나왔다면 아마도 코로나-19 하의 세계, 더 정확히 말하자면 백신민족주의와 함께 편견의 끝이라 할 수 있는 인종주의에 기반한 증오범죄 역시 이 책에 실리지 않았을까?
물론 작가가 이 책에서 예시로 든 역사상 최악의 사례는 사람마다 달라질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예컨대, 저자가 예시로 든 시황제나 명 정덕제에 대한 평가가 그럴 것이다. 진시황은 그 공과 과가 극명하게 갈리는 인물임이 원인일 것이며, 정덕제는 그 뒤에 즉위하는 명 왕조의 막장 황제들이었던 가정제·만력제·천계제에 비하면 재평가 여지가 분명히 있기 때문이라고 필자는 생각한다. 여하튼 그건 결국 개인의 판단, 우선순위의 차이니 말이다. 이견이 생기는 것은 당연하다. 다만 필자가 생각건대, 우리에게 질문을 던지는 가장 큰 문제 중 하나는 전쟁과 ‘정복’이 아닐까 지금 생각해본다. 아마 필자가 현재 유사 상황에 대비해 존재하는 조직에 소속된 특성상, 항상 느낄 수밖에 없는 전쟁에 대한 생각이 그런 생각을 하게 한 것이 아닐까 싶다.
사실 인류사를 멀리서 조망해보면, 인간의 역사는 서로 싸우고 누군가를 정복(다른 말로는 학살이라고도 하는 행위)하는 행위가 절반 이상이었다. 그것은 누군가에게는 역사이자 기억이기도 한, 불과 우리의 조부모 세대의 삶이기도 했던, 그리고 ‘결코 조용히 살 수 없었던’ 20세기에도 매한가지였다. 20세기만큼 인류의 머리가 놀라운 속도로 정교해지고 수준 높아졌던 시대는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만큼 인류의 뇌는 더 교활해지고 잔인해졌다. 고도의 사고 기계라는 목표에는 가까워졌으나, 정작 그만큼의 도덕에는 가까워지진 못한 것이다. 가장 발달했다 여겨 의심치 않았던 문명은 가장 ‘효율적인’ 학살을 자행했다. 그리고 그 전쟁은 그 자체로, 정복과 맞물려 수많은 이들이 피눈물을 흘리게 했다. 최근의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의 패소 역시 그 근원을 소급한다면 인류의 이 위대하지 않은 행동에 원인이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역설적이긴 하지만, 문명에 대한 회의는 문명의 발달과 함께 자랐다. 그리고 문명의 발달과 반드시 동반되는 시간의 흐름 속에 인류의 행동은 서서히 망각되어 왔다. 사실 어떻게 보면 당연하다. 인간의 뇌는 컴퓨터가 아니니까. 죽은 자는 두 발로 설 수도, 고발할 수도 없다. 살아남은 자들은 끊임없이 몰려드는 새로운 문제와 현안을 해결하기 위해 과거를 서서히 잊기 시작한다. 그렇게 우리는 잊으면 안 된다고 말하면서도 잊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역사의 부정할 수 없는 우울한 면, 가혹한 비극의 칼날을 어떻게든 멈출 수만 있다면......’ 이라는 소망 섞인 한탄이 나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다만 다행스럽게도 우리가 만들어 온 세상은 비관 그 자체는 아닌 듯하다고 감히 말해본다. 일단 어두운 면만 놓고 보면 정말 ‘답이 없다’라는 소리가 절로 나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더 넓게 보자면, 위대하지만 전혀 위대하지 않은 사고회로인 두뇌를 가진 인간은 그 뇌를 이용해 어떻게든 살아왔고, 실수를 연발하며 지독하게 일을 망치면서도 어떻게든 수습을 하고 세상을 유지해왔다. 그리고 자신의 폭력성을 제어하며 평화롭게 살 방법을 모색하며 그 길을 걸어오려 했다. 당장 제3차 세계대전이 70여 년이 넘게 안 일어나고 있는 것은 그걸 증명하는 게 아닐까?
한 번도 본 적 없는 이의 말에 따라 한 번도 본 적 없는 이를 죽이는 행동을 하면서도 그 속에서 인류는 인류애를 어떻게든 유지하고자 시도했다. 1914년의 ‘크리스마스의 정전’이 그 예일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작가는 그동안의 일에 대한 경고와 인간에 대한 최소한의 신뢰를 이 책에서 보여주려 한 것이 아닌가 필자는 생각한다. 우리에게 그동안 감당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설 것만 같았던 무수한 실수를 보여주면서 필립스는 경고를 하지만, 그와 동시에 인간의 학습 능력에 대해 희망을 버리지 않으면서 우리에게 숙제를 하나 던진다.
‘실수는 누구나 한다. 그건 인간의 진화 특성상 어쩔 수 없다. 내가 이 책 앞에서 말했잖아. 다만 그걸 감당할 수 있느냐 없느냐의 차이지. 최소한 우리가 학습능력이 있다면 식민지배는 문명을 심고 식민지에 도움이 되었다는 둥 기후위기 따위는 없다는 둥 헛소리하면서 현실도피하지 말고 감당 안 될 막장스런 행동은 하지 말아야 하지 않겠냐?’라고 무언의 메시지를 던지면서 말이다.
끝으로 우리에게 가해진 새로운 시련, 1년째 계속되는 코로나 시국은 우리의 삶을 통째로 바꿨다. 일상이 비일상이 되고, 그 과정 속에서 인간의 여러 본성적 면과 추악한 면, 고도의 통제력과 이성적인 면이 동시에 수면 위로 떠올랐다. 어쩌면 인류사에 어떻게 기록될지에 대해 우리의 행동이 다시 시험대에 오른 것이라 할 수 있다. 그 속에서 인류는 어떻게 문제를 해결할 것인가? 역사가 우리에게 던지는 근본적이면서도 사소한 질문에서 출발한 이 책이 읽는 이들로 하여금 각자의 문제제기를 할 수 있으면 한다는 희망사항과 함께 이 글을 마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