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학 전공자라면 ‘전국역사학대회’의 존재에 대해 한 번쯤 들어봤을 것이다. 전국의 모든 역사학 연구자와 학회가 서울대학교에 모여서 대주제에 관한 발표와 토론을 진행하는 행사인데, 이번 대회에서는 ‘기억과 유산’이라는 대주제를 중심으로 하는 발표가 진행되었다. 기억과 유산, 그리고 이와 연관되는 기억의 재편과 형성의 관점에서 이번 분과발표 중에서는 유사역사학 및 뉴라이트 역사학의 문제에 대한 발표가 있었다. 나 역시 이번 자유패널 주제에 흥미가 동해 참석했고, 그때 들은 발표 내용에 대해 다뤄볼까 한다.
원래 모든 일이라는 것이 취미로 하면 재밌지만, 일로 하면 재미없는 것은 만고의 진리이다. 역사학 역시 그렇다. 특히나 역사학은 인간이 본능적으로 이야기의 형식을 가지고 시공간상 경험을 전달하는 특성상 관심을 가지기 좋아하는 주제이고, 그러한 점에서 인터넷상에서도 역사에 대한 지식은 꾸준히 수요와 공급이 존재한다. 문제는 이렇게 퍼지는 역사학이 단순히 인터넷 밈 수준의 피상적으로 소비되는 것 이상으로, 그 틈을 파고들어 역사학의 본질을 흐리는, 유사역사학의 등장 역시 존재한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왜 역사학자들이 유사역사학에 대해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인가? 사실 유사역사학의 문제는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고, 한국에만 한정되는 문제가 아니다. 사람이 역사를 다룸에 있어 유의해야 하는 점을 잊고 자신이 속한 집단만의 만족을 위해 역사를 도구로 만드는 행위는 국적과 시대를 가리지 않는다. 최근 한국에서 학계가 유사역사학이나 극우주의적 사관의 문제를 지적하는 이유는 그러한 보편적 현상으로서의 문제점도 있지만, 유사역사학 및 뉴라이트 사관이 갖는 조직력과 침투 능력이 위험 수준에 이르렀다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유사역사학 집단은 자신들이 ‘진짜 역사’를 연구하는 집단이라고 선전하며, 기성 집단을 ‘식민사학’ 집단으로 매도하면서, 현대사의 콤플렉스를 자극해 학문의 영역에 적과 아군 개념을 만들어 자기변호를 한다. 하지만 아이러니한 점은 실제로 그들이 내세우는 이론이 식민주의 역사관에 기반한다는 것이다. 정작 식민주의 이론에 기반한 집단이, 자기 눈에 박힌 기둥은 못 보면서 남 눈에 박힌 가시는 기가 막히게 잡고 늘어지는 모순은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보통 역사학계가 우려하는 집단은 크게 2가지인데, 하나는 고대사에서 주로 활개치는 유사역사학이고 다른 하나는 현대사에서 난동을 부리는 뉴라이트이다. 이번 글에서는 2차례에 걸쳐 유사역사학과 뉴라이트 역사관의 문제가 무엇인지, 그리고 그러한 사관이 왜 문제인지, 현재 역사학에 필요한 것은 무엇인지에 관해 이야기해볼까 한다.
1. 고대사에서 난동을 부리는 유사사학: 낙랑군 문제와 식민주의 사학
고대사는 다루는 시대의 특성상 사료가 절대적으로 부족하기에 제한된 양의 사료를 가지고 역사적 상상력을 최대한으로 발휘해야 하는 분야이다. 그렇기에 보통 고대사를 공부하는 선생들이 상상력이 풍부하다고 우리끼리 농담으로 이야기하곤 한다. 하지만 이 ‘역사적 상상력’은 우리가 일상적으로 말하는 상상력과는 조금 다르다. 논리와 개연성을 갖추고, 당대 시대상을 고려하는 조건하에서 진행하는 상상이 역사적 상상력이다. 그리고 그 상상의 증거는 서지사항과 내용을 엄격히 검증한 사료가 기반이 되어야 한다.
이러한 점 때문에 고대사 영역에서 유사사학 집단이 많이 꼬이는 것이 아닌가 싶다. 그 중에서도 유사사학 무리가 고아대는 영역 중 하나는 바로 낙랑군 문제이다. 그들의 관점에서 낙랑군은 한반도 최초의 국가 고조선을 멸망시키고 한(漢)이 세운 ‘식민지’라고 생각하기에, 민족의 자존심을 ‘긁는’ 존재였기에, 시선이 집중되지 않는다면 그게 더 이상할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생각해 볼 점이 있다. 우선 첫 번째는 ‘고대에도 식민지가 있었는가?’에 관한 것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고대 그리스에서 나타난 것과 같이 무역이나 정착 생활을 위한 식민지라는 개념 자체는 고대부터 있었지만, 우리가 알고 있는 식민지, 그러니까 제국주의와 연동되어 불평등한 착취적 경제구조를 만들고 본국의 이념을 강제로 주입하는 형태의 식민지는 19세기에 와서야 만들어진 역사적 산물이었다. 이러한 점에서 유사사학의 관점은 현대적 관점을 별도의 검증 없이 과거에 그대로 투영한 오류를 범했다고 볼 수 있다.
고고학에서도 낙랑군이 식민지배 기지 역할을 했다고 볼 근거는 없다고 본다. 그 이유는 일단 근대적 식민지배를 했다기에는 지역 자체도 작고, 식민지배 유지를 위해 필요한 군사 관련 유적이나 유물이 거의 안 나왔기 때문이다. 심지어 고조선 멸망 후 한이 세웠던 한사군 중 낙랑을 제외한 진번군, 임둔군, 현도군은 이동과 소멸을 반복했고, 역사상 존재감도 거의 없다. 더욱이 중국 왕조가 전한에서 신, 후한으로 변천되는 과정에서도 한사군은 그대로 유지되었고, 중국 왕조와는 별개로 도는 존속 기간을 보유했다. 즉, 우리가 아는 ‘제국에 철저히 복속되는 식민지’의 모습이 나타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현대 학계는 낙랑군을 위시한 한사군을 중개무역 기지, 또는 한반도와 중국 왕조가 상호간 도움이 되기에 남겨둔 조계지에 가까운 것이라고 보는 학설을 채택하고 있다.

그렇다면 왜 낙랑군은 민족주의 감정에 휩싸인 공간인 동시에 민족주의 사학을 자처하는 유사역사학이 시도때도 없이 소환하는 대상이 되었을까? 이 문제의 기원을 추적해보면 우리는 한 가지 사실을 알 수 있다. 바로 유사역사학이 실제로는 일본이 만든 식민사학의 사고틀을 사실상 외피만 바꿔 그대로 따르고 있다는 것.
2. 낙랑군을 둘러싼 연구 과정
낙랑군에 관한 연구 자체는 일제강점기 동경제국대학 교수이자 건축사가였던 세키노 타다시(関野貞, 1868~1935)가 1910년 조선총독부의 지원을 받아 진행한 조선 지역 고분 조사에서 출발한다. 세키노의 원래 계획은 고구려 유적을 찾는 것이었지만, 한반도 북부에서 낙랑 유적을 발견하면서 그는 본격적인 낙랑군 이론 만들기에 착수한다. 그 과정에서 그는 제국주의의 결과로 나타난 식민지 상태를 옹호·강화하는 이념, 식민주의에 봉사하는 사학 이론 만들기의 주동 인물이 되었다. 그가 만든 식민사학 이론이 바로 타율성론이다. 일본 관학자들은 근대 동아시아 관계를 고대사에 작위적으로 투영해 서사를 구축했는데, 그것이 바로 낙랑군과 임나일본부와 연계되는 타율성론이다. 이 이론은 ‘고조선 멸망 이후 한반도 북부에는 한사군이 있었고, 남부에는 임나일본부가 있었으며, 이는 오랫동안 한반도 국가가 주변 강대국 세력에 휘둘리며 주동적으로 역사를 만들지 못했음을 증명한다’는 것을 골자로 한다.

이러한 타율성론에 입각한 역사 만들기는 총독부 산하 조선사편수회가 편찬한 『조선사』에서도 드러났다. 이 책은 고대사를 기술함에 있어, 고조선 항목을 두지 않고 목차를 ‘청동기-철기-낙랑’으로 편제했다. 설령 낙랑군이 근대적 식민지라는 말이 옳다고 하더라도, 뭔가 이상하지 않은가? 보통 역사학에서는 멸망 이후 식민지가 된 국가에 대해서도 일반적으로 ‘멸망 이전 국가 또는 집단’이라는 개념으로 다루는 것이 학술적으로 당연하다고 여기는데, 일제가 만든 타율성론에 기반한 한반도 고대사 서술에는 그런 것이 없었다. 고조선과 낙랑 연구를 일본 관학자들이 독점한 상황, 그리고 한반도 국가가 자체적으로 추동한 역사가 없었다고 주장하는 사고관은 전후에도 오래 유지되었다. 그것은 관변 사학, 고고학, 북한 학계, 그리고 유사사학 전체에 영향을 행사한 것이었다.
해방 이후 낙랑군 연구는 남북한에서 각기 다른 양상으로 진행되었다. 남한의 경우, 고대사 기록 자체의 수가 제한적이었고 현장에 대한 접근 또한 제한되어 있었기에, 1960년대까지는 주로 일제가 남겼던 고고학 연구 보고서나 전후 일본을 통해 들여온 북한발 연구 성과를 간접적으로 추적해 고조선과 낙랑을 연구했다.
오히려 1950~60년대까지는 북한이 위만조선과 낙랑군에 관한 연구를 주도하고 학술적으로 의미있는 성과를 많이 냈다. 해방 이후 사학계·고고학계는 식민사학의 잔재를 걷어내는 것을 시대 과제로 인식했고, 그 점은 북한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일제가 독점한 한반도 국가 연구의 틀을 우리의 손으로 다시 완성하고 싶어했던 것은 당대를 살았던 조선인~한국인들이 원하는 것이었고, 북한 학계에는 도유호(都宥浩, 1905~1982), 김석형(金錫亨, 1915~1996)와 같이 유능한 학자들도 있었기에 연구 성과를 못 낼 것도 없었다.
인물 참고)


*도유호(都宥浩, 1905~1982)
: 함흥 출신. 독일 프랑크푸르트 대학과 오스트리아 빈 대학에서 각각 사회사, 고고학을 전공. 1931~1939년 동안 빈 대학 선사연구소에서 고고학, 민속학 연구. 해방 이후에는 김일성종합대학 교수, 조선역사편찬위원회 원시사분과위원을 역임. 이후 고고학 및 민속학연구소장을 역임.
그는 유적발굴 조사를 통해 고조선 위치비정설에 참여하여 고조선 재평양설(在平壤說)을 주장했고, 1960년대에는 그동안의 조사 결과를 바탕으로 『조선원시고고학』을 출판했으며, 이전까지 정리되지 않았던 한반도 원시고고학을 최초로 체계화했다. 하지만 1963년, 그가 주장한 문화 전파이론 채용이 변증법적 유물론에 위반되는 반동적 학설이라는 비판을 받은 이후, 도유호의 입지는 점점 좁아졌고, 그 과정에서 북한 학계에는 국수주의 이론이 원칙으로 정립되었다. 1965년 도유호는 북한 학계에서 사라졌고 그 이후 행방에 대해서는 명확히 알려진 바가 없다.
*김석형(金錫亨, 1915~1996)
: 대구고등보통학교와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 조선사학과 졸업.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투옥되었다가 해방과 함께 석방. 해방 이후에는 서울대 사범대학 역사교육과 조교수를 맡다가 1946년 대학동기 박시형과 월북해 김일성종합대학 역사학부 교수를 역임. 이후 1956~1979년 동안 사회과학원 역사연구소 소장을 역임하면서 북한 역사학계의 중진이자 원로 역할을 수행.
그는 일제 식민사학에 대한 본격적인 비판을 가하면서 유물사관에 입각한 한국사 체계화에 큰 영향을 미쳤다. 『리조병제사』(1954), 『조선통사(상)』(1956) 중 고려후기 부분, 『봉건지배계급을 반대한 농민들의 투쟁(고려편)』(1960)이 그의 대표적 저술 일부이며, 고대사에서의 식민사관 타파를 위해서도 많은 연구를 진행했다. 그가 발표한 『초기 조일관계 연구』는 임나일본부설을 정면으로 비판하면서 B.C.3~A.D.7세기 동안의 고대 한일관계사를 전반적으로 새로 다루었다.
하지만 1970년대 김일성-김정일로 이어지는 부자세습 체계를 마련하는 과정과 김일성을 포함한 김씨 일족의 우상화가 진행되는 과정에서 북한 학계 역시 본격적으로 망가지기 시작했다. 그 과정에서 낙랑군에 대한 연구 역시 정권의 정통성을 보위하는 목적으로 이용되었고, ‘주체성 강조’라는 이름하에 한사군으로서의 낙랑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 방향으로 학설이 변경되었다. 이 과정에서 등장한 북한의 낙랑군 설명은 ‘고조선 멸망 이후 한반도 북부에는 한 군현으로서의 낙랑군은 부재했고 최씨 낙랑국만 존재하였으며, 평양은 고조선 멸망 당시 함락되지 않았다. 낙랑군은 ’부수도(副首都)‘를 둔 요동 일대에 있었다’로 귀결되었다. 그런데 고조선식 무덤은 1기도 나오지 않았는데 정작 평양에서 나온 한식(漢式) 무덤 2,000여 기와 낙랑군의 것과 동일한 양식의 유물-유적, 문헌 기록 출토는 뭐라고 설명할 것인가? 이에 대해 북한은 ‘평양에 출장 온 낙랑군 관리가 남긴 것’이라는 궁색한 설명을 내놓았다. 기왕에 설명을 하려면 좀 개연성 있게, 그럴듯하게 해야지 이게 무슨 ‘짜치는’ 변명이란 말인가?
이것이 낙랑군을 둘러싼 짧은 시간 동안 벌어진 수많은 촌극이었다. 활극이라면 활극이고 촌극이라면 촌극이라고 할 이 싸움은 결국 무엇을 보여줄까? 북한의 궁색한 변명을 보면 개인 우상화가 모든 것을 말아먹어버렸다고 비판할 수도 있지만, 사실 일제의 식민사관 구축에서부터 시작되는 역사까지 돌이켜본다면 다음의 결론이 나오게 된다. 근대의 눈, 좀 더 정확히는 자신이 처한 현재의 상황~자신이 옹호보위하길 원하는 체제에 봉사하는 관점에서 수천 년 전의 역사를 보는 순간 모든 것이 꼬인다는 것. 조금 더 상세히 말하자면 다음으로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일제 관학자들은 제국주의의 식민지 체제 유지를 돕기 위해 관변 나팔수가 되어, 2천 년이라는 시간 동안 벌어진 변화를 다 무시하며 일부러 입을 닥쳤고, 북한 학계는 지도자의 우상화와 더불어 한반도 최초의 국가 멸망 이후 들어선 집단을 근대 제국주의 시기의 식민지와 동일시하면서 민족주의 사학에서의 ‘통사(痛史)’라는 개념만 가지고 모든 것을 설명하려 하면서 학문 자체를 망쳐버렸다고 말이다. 이러한 점에서 역사학 사용설명서의 ‘취급 주의사항’에는 다음의 문구가 적혀있다.
“인간의 역사를 게임에서의 레벨업, 또는 우열의 관계와 동일한 것으로 보지 마시오.”
3. 식민사학을 향한 반박과 그 한계: 민족주의 사학과 사이비 역사학
당연히 이러한 타율성론이 말도 안 된다는 것을 반박한 학자들도 일제강점기 당대에 존재했다. 민족주의의 감정에서 봐도, 그런 것을 다 걷어내고 학술적 관점에서 봐도 식민사학의 타율성론은 말이 안 되기 때문이다. 고대의 점령과 근대의 점령을 동일한 것으로 볼 수도 없거니와 설령 한 시대의 점령 하나만 가지고 그로부터 2천 년 뒤에 벌어지는 사건이나 국면도 동일한 것이라고 어떻게 단정하는가? 시공간상 변화를 캐치해 그 원리와 본질을 규명하는 것이 역사학의 본임인데, 그걸 다 무시하는 순간 그놈들은 정치가들의 관변 나팔수일 뿐 학자라는 계급장 다 떼야겠지.
이러한 점에서 신채호, 정인보 등 민족주의 계열 사학자들은 낙랑군과 연결되는 타율성론을 타파하기 위한 대항연구를 진행했다. 정인보의 경우, 고조선의 중심이 요녕성에 있었으며, 낙랑은 조선에 없었다고 주장했다. 물론 1960년대에 요녕성 등지에서 비파형 동검이 발견되어 1960~70년 동안의 토론 끝에 고조선 요녕설이 정설이 되긴 했지만, 정인보가 학설을 제시할 당시에는 조선에서 고조선 관련 유물-유적이 발굴되지 않았기에 그리 주장한 것이었다.
하지만 당대 민족주의 사학 역시 후대에 와서는 비판을 받는다. 바로 낙랑군의 존재가 한국사의 타율성을 의미한다는 논리 그 자체를 부정하지 못했다는 점에서 말이다. 그동안의 민족주의 사학이 ‘낙랑군이 한반도에 있었기에 한반도 국가는 타율성에 젖어있었다’는 주장을 타파하기 위해 노력했지만, 결국 낙랑군이 한반도에 있지 않았다는 설까지만 나아갔을 뿐 지정학에서의 지리적 결정론이라는 판을 벗어나지 못했다는 비판이 제기되었다. 결국 논리의 구조 그 자체를 깨는 단계까지는 나가지 못했다는 것이 비판의 골자이다. 그러한 점에서 식민사관의 무서움이 무엇인지 우리는 알 수 있다. 하나의 강고한 틀을 만들어 그것을 비판하는 자들도 정작 그 논리틀 자체를 깨지는 못하게 만든다는 것. 그게 진정으로 무서운 점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적어도 그 당시 민족주의 사학자들에게는 나름의 변명거리가 있다. 그 당시에는 지정학이 학술적으로 유의미한 것이라고 인식되었기에 그 사고구조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 쉽지 않았다는 점이 첫 번째였다. 지정학에서의 지리적 결정론이 정치와 결합되면 굉장히 위험한 결과가 나온다는 비판이 제기되면서 지리적 결정론이 힘을 잃는 것은 2차대전 이후 세계의 모습이기에, 그 이전 시대를 살았던 이들은 그에 대해 비판하기란 쉬운 것이 아니었음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두 번째는 민족주의 사학자들에게 있어 식민사학이란 학술적으로 시간적 여유를 가지고 비판할 수 있는 학문의 대상이 아니라, 조선인들에게 사상적으로 목줄을 채우기 위한 일제의 장기 프로젝트로서의 흉계 내지는 획책이라는 인식이었다. 실제로 일제는 역사를 사상적 무기로 쓰고 있었고, 민족주의 사학자들에게 있어 식민사학에 대항하는 것은 학술적 논쟁 그 이상의 사상적 투쟁의 과정으로 인식되었기 때문이다.
그럼 우리가 사이비 역사학을 민족주의 사학보다 더 강력하게 비판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적어도 당대 민족주의 사학에는 인정할 만한 당대의 맥락이라는 사유가 있었지만, 사이비 역사학은 그마저도 없기 때문이다. 보통 고대사 영역에서 활개치는 사이비 역사학이 내세우는 주장의 주요 패턴은 낙랑군 위치 자체의 부정이나, 중국 대륙사를 한반도 역사로 대체해야 한다는(?) 것 등이다. 결국 20세기 초의 지리적 결정론에서 못 벗어나고 있는 셈이다. 이전의 연구에 대한 비판은 모든 학자들에게 있어 당연히 할 수 있는 것이고, 응당 해야 하는 것이다. 그래야 학계의 발전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도 건설적인 비판이어야지, 하루가 멀다하고 ‘현재의 학계는 다 친일사학 추종자’라는 선동에 가까운 욕만 잔뜩 해놓고서 정작 가져오는 것이 일제가 주장한 지리적 결정론 주변만을 계속 맴도는 것이라면 어느 학자가 그것을 건실한 비판이라고 수용하겠는가? 이런 상황에서 정상적인 학자가 동료비판으로 할 말이라고 한다면 딱 하나다.
‘네가 주장한 것은 이전의 학설, 그것도 정치적 이데올로기를 정당화하기 위한 주장을 앵무새처럼 반복한 것에 불과하다. 이는 이전까지의 선행연구에 대한 비판적 검토도 하나 없는, 그동안의 연구 과정을 모두 무시한, 학술적 가치가 하나도 없는 것이다.’
이해가 잘 안 간다면, 회사에서 발표하는 프로젝트 기획안이라고 생각해보자. 새로운 프로젝트를 실행해야 하는데, 지금까지 제시된 프로젝트는 다 구태의연한 것이라고 욕하면서 갖고 온 것이, 약 30년 전 실행했다가 신통한 결과도 없이 죽 쒔던 프로젝트 안을 단어만 바꾼 기획안이면 어떨까? 학계는 그나마 체면 차리는 공간이니까 신랄한 상호비판이 돌아오는 선에서 그치지, 기업이면 바로 ‘이딴 걸 기획안이라고 써 왔냐?’는 욕지거리와 함께 면전에 기획서가 날아들지나 않으면 다행일 것이다. 더 재수 없으면 이런 말을 들을 수도 있을 것이다. ‘너 돈 벌기 싫으냐?’라고 말이다.
기업은 돈을 벌기 위해서 새로운 아이디어에 기반한 발전이 필요하고, 학계는 자유로운 사유의 발전에 기반한 인류의 건전한 영속이라는 목표를 위해 발전이 필요하다. 그 과정에서 가장 경계해야 하는 것이 바로 역사의 수단화이다. 사이비 역사학이 하고 있는 행동이 역사의 수단화를 지향했다가 사고를 거하게 친 집단과 똑같기에, 그리고 그것을 정작 본인들이 모르기에 학계는 그들을 비판하는 것이다. 역사의 수단화를 지향했던 집단이 누구냐고? 이런 분야에서 양파와 같이 까이는 두 집단, 일본 제국과 나치 독일이다. 전자는 『고사기』를 정사라고 가르치면서 소위 ‘대동아공영권’을 실현하려다가, 아시아-태평양 전역에 전쟁 그 자체만을 위한 광신도들의 결과물로 기아로 말라비틀어진 시체 더미, 그들 자신의 ‘페티시즘’의 결과물인 목 잘린 시체를 무수히 남겼다. 후자는 시온의정서를 위시한 유대-볼셰비즘 격멸은 민족의 숙원 사업이라고 외치면서 전쟁을 벌인 결과, 쓰레기 더미와 함께 지층 단위로 남는 해골 더미를 이름 모를 동네와 평원에 무수히 남겼다. 분별없는 역사의 현재화가 낳은 결과가 얼마나 참혹한 결과를 갖고 오는지는 우리가 이미 봤다. 그래, 누군가에게는 ‘위대한 영광을 실현하는 과정’에서 일어난 ‘부수적인 실수’일 것이다. 근데 지층을 만들 정도로 벌어진 학살을 누가 실수라고 하나?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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