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니키타 흐루쇼프 시기 종교정책: 1953~1964
스탈린 사후 진행된 권력 투쟁에서 승리한 니키타 흐루쇼프는 대부분의 정치 수뇌부 성원들이 가지고 있었던 생각, ‘왜 이놈의 나라는 중간이 없냐?’와 ‘더 이상 스탈린식의 정치는 안 된다!’라는 생각을 실행에 옮기기 시작했다. 대표적인 것이 바로 ‘스탈린 격하 연설’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소련공산당 제20차 당대회 연설 <개인숭배와 그 결과에 대하여>였다. 이 연설을 기점으로 스탈린식의 정치도 서서히 변하기 시작했다. 중공업 일변도의 경제정책도 서서히 변하면서 일반 경공업 소비품을 포함한 일상의 질을 높이는 데에도 신경을 쓰기 시작했다. 대표적인 것이 한 방에 여러 세대가 부대끼며 사는 열악한 주거환경 문제 해결을 위해 조성한 대규모 아파트 단지였다. (이때 지어진 아파트 단지는 ‘흐루숍카’라고 불렸다.)
하지만 ‘개인숭배 비판 연설’에서 흐루쇼프가 스탈린을 무조건적으로 비판하지 않았듯, 스탈린식의 통치 방식을 서서히 버린다고 해서 소련의 종교정책이 하루아침에 반대로 변한 것은 아니었다. 전략적 목표로서 종교를 인민의 삶 속에서 지우겠다는 소련공산당의 이데올로기 원칙은 소련이 해체되는 그날까지 유지된 것이었고, 그건 흐루쇼프 집권기라고 해서 달라지진 않았다. 이전과 달라진 것이 있다면, 스탈린 시기처럼 이데올로기를 동원해 성직자와 열성적인 신자들을 ‘반혁명 분자’라는 꼬리표를 달아 물리적으로 제거하는 것보다는 이데올로기를 하나의 독자적 요소로 이용하는 데에 주력했다는 점이었다.
1954년 7월 7일, 소련공산당은 <과학적, 무신론적 프로파간다에서의 큰 문제점과 그 개선을 위한 대책> 분석을 실시했다. 이 결정안에서는 단순히 종교를 반대하는 것을 넘어서 ‘과학적 관점’에서 종교의 핵심을 폭로할 수 있어야 함을 주문했고, 이에 따라 학생에 대한 교육 사업 역시 전투적 유물론을 체화해야 함을 강조했다. 물론 그 전투적 유물론은 스탈린 시기의 전투적 무신론 선언과 결부된 것이었다.
다만 이 결정은 금방 도전을 받게 되었다. 뱌체슬라프 몰로토프(Vyacheslav Molotov, 1890~1986), 게오르기 말렌코프(Georgy Malenkov, 1902~1988), 클리멘트 보로실로프(Kliment Voroshilov, 1881~1969) 등 스탈린의 측근이었던 실용주의자들이 이러한 당의 결정이 신자와 성직자들의 종교적 감정을 모욕함으로써 소련의 대외적 위상을 손상시키는 동시에 국가 안팎으로 부정적 반응을 유발할 것이라고 지적한 것이다. 물론 이것이 종교에 대한 호의적 태도를 보인 것으로 해석되어서는 안 된다. 그 이유는 실용주의자들의 비판은 기본적으로 스탈린이 만든 이데올로기 시스템의 안정성과 대외정책 목표 달성을 위해 종교는 얼마든지 사용하고 버릴 수 있는 도구로 간주했다는 점에 초점을 맞추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여하튼 이러한 점에서 1954~1957년까지 러시아 정교회에는 잠깐의 봄이 찾아오게 되었다. 수정주의자들의 지적이 수용되면서 무신론 선전에서의 직접적인 종교적 감정 자극 내지는 모욕은 중단되었고, 스탈린의 개인숭배 비판에 따라 굴라그에서 살아남은 성직자들 대다수가 다시 성직에 복귀하게 되었다. 또한 1955년부터는 정교회 주교들이 소련 최고 소비에트 및 해외 대사관 접견에 참석할 권한을 갖게 되었고, 성경 및 복음서 출판도 허가되었다.
<표 1> 1954~1957년 소련 내 종교시설 추이
1954년 | 1957년 | |
성당 및 기도소 (개소) | 13,422 | 13,430 |
수도원 (개소) | 59 | 57 |
그러나 1958년부터는 다시 러시아 정교회에 겨울이 찾아왔다. 왜 1958년인가에 대해서는 사실 설이 분분하다. 국가 정책상 대전략으로서의 종교 탄압은 변한 적이 없었고, 1958년부터는 흐루쇼프 독주 체제가 완성되었기에 스탈린 파벌이었던 실용주의자들의 의견을 들을 필요가 없었던 상황이 벌어지면서 이러한 종교 탄압은 필연이었다는 설도 있지만, 사실 우연적 요소가 더 많았기 때문이었다. 여하튼 이 시기부터 가해진 종교에 대한 탄압은 2가지 방면으로 전개되었다. 하나는 이데올로기적 공격이었고, 다른 하나는 재정적 압박이었다.
우선 재정적 압박부터 보자. 소련 장관회의는 1958년 결정을 통해, 수도원의 고용 노동력 활용을 금지하고 토지세를 점점 증가시키는 동시에 교회가 주로 수입원으로 사용하던 양초 판매에 대해 이전 대비 70배 정도의 세금을 부과했다. 1959년까지 교회는 연간 100만 루블 정도의 양초세를 납부했지만, 1959년부터는 양초세 약 7,100만 루블을 납부해야 했다.
이 외에도 교회 교육기관의 수를 줄이기 위한 작업 역시 진행되었다. 러시아 정교회에 찾아온 해빙기 동안 늘어났던 교회 학생의 수를 소련공산당이 무시할 수는 없었다. 교회학교 야간학부 폐지, 중등/고등교육 학위 소지자의 교회학교 입학 금지, 세미야르나(상급 신학 교육기관) 8개소 중 3개소 폐지 등이 이 시기 이뤄졌다. 스타블로프, 키예프, 사라토프 신학교가 1960년에 폐쇄되었고, 1964~65년까지 교회학교 학생 수는 4배 감소하였다.
이데올로기적 압박은 1959년 9월 창간된 무신론 잡지 「과학과 종교」를 통해 전방위적으로 진행되었다. 1961년 3월, 소련 장관회의는 <신앙에 관한 법률 집행 관리의 강화에 관한 비밀결정>을 채택했고, 이에 따라 성직자들에 의한 소비에트 법률 위반에 대한 단속이 강화되기 시작했다. 성직자를 종교행사 진행을 위한 피고용인으로 전락시키는 한편, 교회 집사나 지방 촌장들이 실질적인 교구 수장 역할을 수행하게 하면서 국익에 부합하도록 종교 활동을 유도하였다. 특히 1962년부터는 교회 의식에 대한 정보를 국가기관에 의무적으로 보고하도록 하는 시스템이 도입되었는데, 누가 세례, 교회혼례식, 교회 장례식 수행을 주문했는지 여권에 기재하도록 하는 등록부 제도 도입이 그것이었다.
(여권에 이런 정보를 적는 이유는 간단하다. 소련 자체가 소비에트사회주의공화국‘연방’이기에 연방 내 여러 국가를 오가기 위해 국외용 여권과 함께 국내용 여권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이 국내용 여권은 개인 신분증의 역할도 겸하게 되어있었다.)
흐루쇼프 시기 교회통제 정책에서 특별한 위치를 차지하는 것 중 하나는 소련공산당 제22차 전당대회였다. 이때의 당대회가 중요한 이유는 어떻게 공산주의자들이 종교적 이상을 공산주의적, 비종교적 이상으로 내세워 사용했는지를 알 수 있기 때문이다. 22차 당대회는 공산주의 사회의 최종 목표인 무계급사회의 도덕 원칙을 고안하는 이데올로기 만들기 작업에 중점을 두었다. 여기에서 강조되는 것은 ‘위로부터의 도움’ 없이 신세계를 건설하는 인간의 전능함을 강조하는 인간중심주의의 전형이었고, 이 점에서 종교는 청산해야 하는 잔재로 규정되었다. 맑스-레닌주의에 대한 과학철학자 버트런드 러셀의 평가와 같이, 수정된 맑스-레닌주의 역시 ‘신 없는 신학’의 위치를 견지하려 했던 셈이다.
1960년에 흐루쇼프는 장래 20년 안에 공산주의 건설을 완료하겠다고 선언했고, 이러한 점에서 공산주의에 부합하는 새로운 인간의 상 역시 짧은 시간 안에 만들어져야만 했다. 이에 따라 종교 극복은 당 규약의 최우선 사항이자 전제조건이 되었고, 당 강령 작성 및 종교 극복과 관련된 캠페인 역시 진행되었다. 「과학과 종교」는 더 강력하게 종교를 공격하는 논쟁을 전개하기 시작했고, 러시아 정교회의 최고 지휘권자는 러시아 정교회 총대주교가 아니라 소련 장관회의 산하 러시아정교회위원회였다. 실무에서의 권한 역시 위원회 대표자들이 가졌고, 주교들의 교구 사제 임명을 포함한 모든 결정 역시 위원회와의 상의를 거쳐야만 실행될 수 있었다.
하지만 완전한 성직 통제는 이뤄지지 못했는데, 러시아 정교회의 외교활동을 포함한 정치 외적 활동에 소련 지도자들이 기대야만 했던 점이 분명히 있었기 때문이었다. 사실 어찌 보면 당연한 것이기도 했다. 기본적으로 정권은 종교를 최종적으로는 파괴하려고 하지만, 동시에 러시아 정교회의 권위를 정치적 목적으로 사용하려 하면서 세계 거대 종교와의 관계 정상화에 관심을 계속 보여왔기에, 상호모순적인 상황이 계속 연출되었기 때문이다. 일례로 흐루쇼프는 교황 요한 23세와 편지를 주고받았다.
다만 1960년대 중반 당시 흐루쇼프의 권위는 인민 사이에서 높지 않았고, 이는 스탈린 시기와는 달리 인민의 종교성에 흐루쇼프 시기 탄압이 특기할 만한 영향을 주지 못했다는 결론을 남겼다. 1960년대 초 추바시야 공화국, 탐보프, 랴잔, 울리야노프, 케메로보 주 등지에서는 세례, 교회 결혼식, 교회 장례식 등의 의식 수행을 위해 신자들이 성직자를 찾는 경우가 눈에 띄게 증가했다. 결국 ‘1980년에 마지막 소비에트 사제와 악수할 것’이라고 선언한 흐루쇼프의 발언은 구름 위를 떠다니는 소리로만 남게 된 셈이다.
4. 레오니트 브레즈네프 시기 종교정책: 1964~1982
무례함도 불사하는 공격적인 흐루쇼프의 리더십과 모험주의에 입각한 그의 독주를 불만스럽게 보던 당내 고위층 인사들은 1964년, 결국 흐루쇼프를 축출하는 데에 합의했고 이에 따라 흐루쇼프 실각 이후 레오니트 브레즈네프(소련공산당 제1서기)-알렉세이 코시긴(소련 장관회의 주석)-니콜라이 포드고르니(소련 최고회의 상무회 주석)가 이끄는 삼두정이 탄생하게 되었다. 브레즈네프 시대는 ‘회색 시대’라는 이름에 걸맞게, 전쟁이나 무자비한 정치적 테러, 정치-경제-사회를 모조리 뒤흔드는 혼란이나 멸망도 없었던, 나름대로 안정된 시대였다. 흐루쇼프 시기부터 진행한 소비재-경공업 산업이 서서히 결실을 맺으면서 소련 인민의 생활 수준은 전반적으로 향상되기 시작했고, 공개적으로 반정부-반사상적 행동을 하지만 않으면 어느 정도의 자유는 보장되는 시대가 열렸다.
이러한 경향은 종교정책에서도 드러나기 시작했다. 무신론 선전가들의 공격적인 언동은 서서히 잦아들기 시작했고, 교회 의식 수행에 대한 통제가 완화되면서 교회 의식 역시 횟수가 늘었다. 칼미크인*들이 전통적으로 믿던 불교에 대해서도 신앙이 허용되었고, 이슬람교, 여호와의 증인, 오순절/ 침례교 일부 종파에 대해서도 일부 허용이 이뤄졌다. 러시아 정교회에 대한 통제가 완화되었음을 보여준 상징적 사건은 바로 1964년 보스토크 발사를 기념하는 정부 접견에 대주교 니코딤과 주교 피티림이 공식적으로 참여한 것이었다. 1965년에는 최고소비에트 상임위원회 결정에 따라 유죄를 선고받았던 성직자와 신자들에 대한 석방 및 복권이 단행되었으며, 대표적인 반종교 출판물인 「종교 및 무신론 역사박물관 연보」와 「종교 및 무신론 역사의 문제들」의 간행이 중단되었다.
* 오이라트 4부족 연맹의 일부인 토르구트부의 후손 격인 민족으로, 러시아 남부 카스피해 인근에 있는 몽골계 민족
물론 그렇다고 해서 소련의 종교통제 정책이 없어졌다는 것은 아니었다. 소련공산당의 종교를 바라보는 기본 시각이나 전략적 목적은 확고했기에, 종교행사에 몰래 참석했다가 적발된 당원들은 그 행위 자체가 징계사유로 인정되어 출당당했다. 동시에 1960년부터 소련 장관회의 산하 종교위원회의 영향력이 더 커졌는데, 종교위원회는 처음 만들어질 당시 영향을 받던 국가보안위원회(KGB)의 영향력에서 서서히 벗어나 당중앙위원회와 더 가까워지기 시작했다. 사실상 1965년부터 종교위원회는 소련 종교정책을 총괄하는 부서가 되었고, 종교에 관한 모든 대소사는 반드시 종교위원회의 참여가 있어야만 통과될 수 있었다. 하지만 이 위원회는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당중앙위원회와 밀착되면서, 당과 국가 최고기관이 정한 선 안에서만 움직이게 되었다.
러시아 정교회는 ‘평화를 위한 투쟁’(≒반미투쟁)과 종교를 연결하는 전술을 구사해 입지를 유지하려 시도했지만, 전술적 영역에서의 생존은 보장할 수 있었어도 전략이라는 측면에서의 변화를 끌어내지는 못했다. 이 시기 공식적인 교회 발언에서는 소비에트 사회의 ‘긍정적 세속성’이 항상 언급되었고, 사회주의 사회는 성서적 가르침을 따르기에 신자들은 전쟁과 평화, 정의로운 사회를 건설하는 것에 있어 세속적인 인민과 견해를 함께 한다는 것이 강조되었다. 단지 차이가 있다면, 영원함이 있다고 이해하는가 아닌가의 차이뿐이라고 덧붙이면서 말이다.
일종의 ‘합법적 사기 내지는 자기기만’이 진행되던 브레즈네프 시기 소련의 종교비판은 이전과 달리 주로 대중지식-대중출판물의 성격을 강하게 띠게 되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종교에 대한 탄압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여전히 국가보안위원회는 교회 행정기구를 통제하면서, 대주교 안수례와 교구 임명을 항상 중요 감시대상으로 취급했다. 성직자와 평신도 모두를 대상으로 체포 외에 정신병원에서의 강제 치료가 적용되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이게 교도소 수감보다 나은 것은 하나도 없었다. 예컨대, 침대에 사나흘 동안 묶어놓거나 이불로 둘둘 만 다음 포박해서 숨도 제대로 못 쉬는 상태로 며칠을 방치하는 등의 학대가 ‘정신병원에서의 치료’라는 이름으로 자행되었다.) 이 시기 국가와 교회는 일종의 게임의 법칙 아래에서 살았다. 정치체제는 이데올로기적 내용을 규정했고, 정교회는 그 내용을 위해 떼놓은 국가의 틈 속에서 당에 대한 필수적인 경의를 표하는 조건으로 존재를 인정받았다. 예컨대, 1977년 소련 헌법 52조는 국가와 종교의 관계를 다음과 같이 규정했다.
“소비에트 연방의 시민들은 양심의 자유, 즉 모든 종교 및 신앙 분파를 믿거나 혹은 어떠한 종교도 믿지 않고 무신론적 선전을 할 자유를 가진다. 종교신앙과 관련하여 적대감과 혐오를 불러일으키는 것은 금지된다. 소련에서의 교회는 국가와 분리되며, 학교는 교회와 분리된다.”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 헌법 1977년 개정판 제 52조 中-
이렇게 신앙의 자유와 권리는 헌법으로 보장되었지만, 무신론 선전만이 헌법을 통해 근거를 얻었고, 종교 선전의 자유는 제외되었다.
5. 유리 안드로포프 시기 종교정책: 1982~1984
브레즈네프가 1982년에 사망하면서 소련은 다시 새로운 후임 서기장을 세울 필요가 생겼다. 사실 1970년대 중반부터 소련은 ‘회색 시대’인 동시에 ‘침체의 시대’가 되면서 정치국의 고령화가 너무 심각해졌다(정치국원들의 평균연령이 70대가 되어버렸다(!)). 1977년 정치국 회의 때는 정치국원들이 아파서 회의에 참석을 못하는 바람에 결원이 무려 절반에 달하는 지경에 이르렀기에 대체 누굴 후임으로 세워야 하는지가 문제가 되었다. 사실 브레즈네프의 후임으로 사실상 내정되었던 소련공산당 제2서기였던 미하일 수슬로프(Mikhail Suslov, 1902~1982)는 브레즈네프가 죽기 몇 달 전에 이미 죽었던 상황인지라 궁정 암투가 전개될 상황이 조성되었지만, 국방장관 우스티노프(Dmitriy Ustinov, 1908~1984)의 “나와 군은 안드로포프를 지지한다”라는 발언을 듣고 체르넨코가 별다른 저항 없이 한발 물러나면서 별다른 잡음 없이 후임 서기장은 유리 안드로포프(Yuri Andropov, 1914~1984)가 임명되었다.
보통 한국에서는 소련사 연구자 수가 많지 않은 데다가 주로 연구하는 시기도 레닌-스탈린 시기, 흐루쇼프, 고르바초프 시기가 주인지라 잘 알려지지 않은 인물이긴 하지만, 안드로포프는 소련 정치에서 굉장히 중요한 인물 중 하나이다. 그는 외교-첩보 분야에서의 실력자인 동시에 1967년부터 15년간 국가보안위원회 주석을 역임한 거물이었다. 1954년 전신인 내무인민위원회가(NKVD) 국가보안위원회(KGB)로 개편된 이래 냉전 후반기 KGB를 진두지휘한 인물이었던 셈이다. 안드로포프는 KGB 주석 시절 굉장히 강경한 인물로 유명했다. 당의 입장에 반하는 이론(異論), 반체제 인사, 종교, 동성애에 대한 강경한 탄압을 통해 서구 사상의 유입을 차단하려 들었던 것이 안드로포프였다.
하지만 안드로포프는 동시에 브레즈네프 시기가 서서히 침체되고 있는 위험한 상황이라고 판단한 인물이었다. 그는 정통 공산주의자이자 무신론자로서 확고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기에 대종교 정책에서의 기본적인 틀을 바꾸지는 않았지만, KGB 주석을 재임하는 기간 내내 당-교회-종교정책을 이끌었기에 종교계 수장들과 오랜 관계를 가지기도 했다. 브레즈네프 시기 정체된 국가 운영 노선에 수정을 가하면서 안드로포프는 사회 기강을 다시 바로잡고 당의 원로 세력을 개혁 성향의 젊은 기술관료들로 교체하는 동시에 문화·예술·언론에 대한 검열과 탄압은 계속 유지했다. 그러나 한가지 특기할 만한 사건이 있었다면, 안드로포프 재임기에 총대주교가 거주하는 수도원 중 하나인 돈스코이 수도원을 러시아 정교회에 환원하면서 국가-교회 간의 관계를 개선하려는 시도가 있었다는 것이다. 문제가 있었다면, 그가 무언가를 제대로 해보기도 전에 지병인 만성 신장병이 심해지면서 정상적인 업무를 제대로 볼 수 없는 상황이었다는 것, 그리고 그 때문에 1년을 조금 넘긴 서기장 생활을 끝으로 세상을 떴기에 이 이상으로 특기할 만한 결과를 끌어내진 못했다는 점일 것이다.
6. 미하일 고르바초프 시기 종교정책: 1985~1991
개혁 성향을 띠던 안드로포프가 무언가를 해보기도 전에 죽어버렸고, 현상유지파였던 후임자 콘스탄틴 체르넨코(Konstantin Chernenko, 1911~1985) 역시 지병인 폐기종 때문에 서기장 임기를 1년 겨우 채우고 죽는 사태가 벌어졌다. 그의 후임으로는 안드로포프의 지지를 받고 있었던 드미트리 우스티노프 인맥의 지원을 받은 미하일 고르바초프(Mikhail Gorbachev, 1931~2022)가 임명되었다. 물론 그것만이 고르바초프의 서기장 취임을 설명해 주지는 않는다. 정치국에는 고르바초프의 경력을 능가하는 안드레이 그로미코 등 원로 인사들이 여전히 많았지만, 고르비가 임명된 데에는 당시 소련공산당 정치국이 겪었던 괴상한 일 때문이기도 했다. 이미 앞에서 언급했다시피, 소련공산당은 전임 서기장들이 무려 연속으로 1년 만에 지병으로 죽어버리는 말도 안 되는 상황을 보았기에, 제대로 된 지도를 해보기도 전에 죽는 ‘거지 같은’ 사태가 또 발생해서는 안 된다는 의견에 정치국원들이 입을 모았다. 그에 따라 정치국원 중 가장 젊고 평판이 좋은 고르바초프가 신임 서기장으로 선출되었다.
앞서 본 바와 같이 1970~1980년대까지 소련 사회는 스탈린 시기와 같이 종교를 사회에 존재하는 ‘반동 세력’으로 간주하지는 않았지만, 공산주의에 반하는 사상으로 간주하는 태도는 변하지 않았다. 하지만 1980년대부터 유가 하락, 전형적인 개도국 스타일의 자원 수출형 경제의 한계 등 여러 요소로 인해 서서히 경제적으로 위기가 찾아오면서 사람들은 이데올로기의 대체물로서 종교에 대해 조금씩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동시에 고르비의 개혁 노선의 기본은 일당독재 체제를 북유럽 스타일의 사회민주주의로 개혁하는 것이었고, 이러한 점에서 정치-사회적 민주주의를 강화하는 동시에 경제에서는 순수 계획경제를 혼합형 경제로 바꾸려고 시도했다. 문제는 그 경제개혁이 제대로 망해버렸다는 것이지만 말이다.
여하튼, 페레스트로이카를 통해 혁명의 비신화화(非神話化)가 진행되면서 이전까지 조금씩 믿어왔던 종교에 대한 관심은 이제 완전한 합법의 영역으로 들어갈 여건이 마련된 셈이다. 이에 따라 소련의 종교에 대한 완전한 태도 변화 역시 이뤄지기 시작했다. 고르바초프 시기 들어와서 교회는 공식 법인으로 인정되었고, 교회에 유리한 작용이 이뤄지기 시작했다.
어찌 보면 소련의 종교정책은 종교와 무신론이라는, 인간이 만들어 낸 두 사고체계가 보여준 ‘영혼의 데스매치’는 영원한 승자도, 패자도 없다는 것을 보여준 것이 아닐까?
7. 외전: 타 사회주의 국가의 종교정책
그렇다면, 소련의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는, 좀 더 정확히는 맑스-레닌주의의 영향을 받은 타 사회주의 국가는 어떤 종교정책을 전개했을까? 이 글에서는 알바니아, 불가리아, 루마니아, 유고연방, 중국, 동독을 사례로 들어 설명하겠다.
알바니아의 경우는 특수 케이스였다고 볼 수 있는데, 동구권이 붕괴되는 1989년까지 알바니아는 자국 내의 모든 교회를 폐쇄하고 일체의 교회 활동을 정지시켰다. 이는 엔베르 호자가 대표적인 반수정주의자였기에 일어난 현상이었다. 그는 1956년에 있었던 소련공산당 20차 전당대회에서의 스탈린 비판을 수정주의적 행보라고 격렬히 비난했으며, 동구권이 붕괴되는 그날까지 스탈린주의에 입각한 강경한 종교정책을 전개했다. 이는 소련이 1970년대 브레즈네프 체제로 대표되는 현실사회주의 노선으로 국가 정책의 대전략을 변경하면서, 종교에 대한 통제를 다소 완화한 것과 대비되는 것이었다.
불가리아, 루마니아, 유고슬라비아 연방의 경우, 당의 통제를 받는 선 안에서 공식적으로 교회가 존재했고, 최소한 일반 인민의 종교 생활 정도는 가능하도록 했다. 어떻게 보면 1970년대 소련의 기조를 충실히 따른 셈이다.
중국의 경우는 지금도 현재진행형인데, 앞서 언급한 대부분의 동유럽과 비슷한 기조를 유지한다. 기본적으로 중국은 공식적으로 종교 활동과 종교의 존재는 인정하지만, 종교조직 내에서의 인사이동을 포함한 각종 결정은 반드시 중국공산당과 상의하고 허가를 얻어야만 활동할 수 있게 하는 구조를 유지하고 있다. 이를 어길 시 중국 영내에서의 추방 등 각종 제재가 가해지도록 되어있다.
동독의 경우는 알바니아와는 반대의 의미로 특수 케이스였다. 타 사회주의 국가와 다른 점은 교회가 약간의 특혜를 받는 위치에 있었다는 점이다. 예컨대 동독의 경우, 교회에서 직책을 갖고 있어도 국가기관에서 복무하는 것이 가능했다. 스탈린이 멀쩡히 살아있던 시절에 ‘소련의 시험관 아기’로 탄생한 동독이 이러한 모습을 가졌다는 것은 어떻게 보면 이해가 되면서도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1953년 동베를린에서의 반소(反蘇) 봉기로 인해 동독 사회주의통일당(SED)과 일반 인민들이 서로의 힘을 체험하면서 암묵적으로 만든 일종의 ‘게임의 법칙’이 종교정책에도 작용한 결과가 아닐까 생각해 본다. 즉, 인민들은 당의 힘이 지금 당장 꺾을 수 없는 힘임을 체감하고, 당은 인민들이 단체로 들고 일어나면 수습이 불가한 수준으로 사태가 악화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으면서, 일종의 정치적 불만의 해소 방안으로 교회를 이용했다고도 볼 수 있다는 말이다. 실제로 교회는 사통당 지도부와 주기적으로 회동을 가지면서 정치적 불만을 해소하는 창구 역할을 했다. 그 불만 해소 공간이 1989년 체제 전환기에 체제를 무너뜨리는 시위를 주도하는 세력 중 하나가 되었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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