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세기에 등장한 제국주의는 전 세계를 강타했다. 에릭 홉스봄의 표현대로 ‘제국의 시대’가 도래한 셈이다. 홉스봄은 『제국의 시대』의 첫 장을 자신의 가족사로 시작한다. 자신의 가족사가 곧 19세기말~20세기 초의 전환기를 그대로 반영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의 부친은 폴란드에서 영국으로 이주한 유대계 집안 출신이었고, 모친은 오스트리아 출신 유대계 가문 태생이었다. 그런데 그 둘이 만나 결혼하고 에릭을 낳은 곳은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였다. 이제 한 국가의 일은 한 국가에만 미치지 않게 된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등장한 것이 경제사상이자 정치사상으로서의 제국주의였다. 그렇게 제국주의는 세계의 반을 할퀴었고, 누군가의 번영은 곧 누군가의 피눈물이 되는 상황이 전 세계에 펼쳐졌다. ‘좋은 시절(벨 에포크)’은 아프리카와 동남아시아를 ‘삥 뜯은’ 부로 이뤄진 것이었고, 다이쇼 데모크라시 또한 조선과 대만에 대고 ‘삥 뜯은’ 결과로 이뤄진 것이었다. 당사자들은 인정하기 싫다고 할지라도, 그들이 먹고 마신 쌀과 콩, 설탕, 차는 모두 그렇게 만들어진 것이었다. 그게 현실이었다.
모든 것을 끝내려 한 2번째 전쟁 이후, 식민지였던 나라들은 서서히 독립해 나갔다. 탈식민화 내지는 해방이라는 과정을 거쳐 세계는 재편되기 시작했다. 끝까지 식민지를 가지고 싶었던 열강도 대세를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영국은 식민지를 영연방으로 재편했고, 프랑스는 베트남과 알제리를 놓지 않으려고 전쟁까지 불사했지만 결국 독립을 인정해야 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식민 지배의 상흔이 다 없어진 것은 아니었다. 프랑스의 경우처럼, CFA 프랑 체제로 서남아프리카 식민지를 경제적으로 종속시키려 한 경우도 있었지만, 해방 이후의 정치적 혼란 속에서 식민주의가 제대로 청산되지 않으면서 일어난 각종 문제도 있었다. 그것이 지금까지 우리 역사에서 일어난 현실이었다. 결국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항에 도달하게 된다.
‘식민지’ 자체는 단순히 그 기간만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이 얘기를 하면 이런 말이 꼭 나온다. ‘그럼 식민지를 경험했다는 걸 지우자는 거냐?’ 내지는 ‘그럼 친일파들 지금 와서 다 부관참시하자는 거냐?’. 식민지에 관한 얘기를 꺼내면 항상 나오는 말이기도 하다. 이런 말이 나오는 이유는 크게 몇 가지로 정리된다. 일단 식민지라는 어감 자체가 부정적이기에 떠올리고 싶지 않다는 인간의 방어기제와 관련된 이유. 여기에는 식민지 시기에 부일배(附日輩)가 되어 부귀영화를 얻었던 것에 대한 부끄러움 내지는 그것으로부터 오는 사회적 비난에 대한 두려움도 포함된다. (그러니까 아주 거칠게 말하면 이거다. ‘본인들도 그게 X 팔리는 짓이라는 걸 아니까! 자기도 사람이면 그걸 모를 수 없지.’) 다른 하나는 친일 청산이라는 기제가 정치권에서 정치적 공격 수단으로 남용되면서 생기는 반감이다. 정치권에서 그걸 다루는 것은 필요하지만, 딱 필요한 순간에만 써야 하는 것을 별로 상관도 없는 분야에까지 걸고넘어지니 문제가 발생하는 것이다. 이러다 보니 결국 적시에 쓰는 식민청산 담론도 그냥 ‘정치꾼들의 뻔하디뻔한 헛짓거리’로 인식되고 만다.
이러한 점에서, 식민지가 남기고 간 상흔은 결코 작은 것이 아니다. 애초에 식민지배를 겪은 입장에서 식민지에 대한 언급은 결코 긍정적인 내용이 나올 수 없다. 그건 당연한 바다. 지금의 세대가 겪은 것은 아니지만 그걸 경험한 자들이 아직도 살아있고, 식민지를 경험한 시대는 끝난 지 1세기도 채 되지 않았다. 빼앗긴 것에 대한 반성이 있어야 되찾는 것에 대한 것도 이야기할 수 있지 않겠는가? 그리고 이미 죽은 자 부관참시해 봐야 남는 것이 무엇이겠는가? 솔직히 그네들이 뜬구름 잡는 소리 한다고 매도하지만, 아니할 말로 청산에 적극적으로 나서는 쪽은 돈이 남아서 그런 짓 하나? 오히려 돈이 더 없다. 그럼에도 친일청산을 외치는 세력이 아직 있는 이유, 그것이 아직까지 정당성을 가지는 이유는 하나다. 최소한 이런 일이 일어났다는 것을 기록으로건 유물로건 남겨야 하니까. 그래야 기억이 역사로 남아버리는 시대가 와도 사람들이 그 시대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를 피상적으로라도 알게 되니까.
우리가 식민지를 이해하는 창구는 크게 3가지이다. 교과서, 박물관, 그리고 대중매체. 이 글에서는 박물관과 대중매체에 대해 얘기해볼까 한다. 보통 박물관의 전시 구성에서 중요한 점은 ‘내용을 담보한다는 조건하에 어떻게 자료를 시각화할 것인가’이다. 이 점에서 박물관은 유물 전시와 배치 동선을 중요시한다. 이는 전통적인 박물관 이론이자 박물관 전시 기획의 기본이다. 그러다가 다음과 같은 문제가 대두되었다. 전시하는 것은 좋은데, 그 과정에서 유물이 훼손되면 어떻게 할 것인가? 이 문제를 해결할 방안으로 원본은 수장고에 보존하고 원본을 복제하는 안이 나왔다. 기술이 더 발전하면서 복제품을 전시하는 것을 넘어 영상 전시를 하는 방안도 등장했다. 유물 보존이라는 차원에서 이것은 나름 중요한 문제이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문제가 생겼다. 실제 자료보다 영상이 더 비싸게 불리는 상황이 발생한 것이다. 주객이 전도된 것이다. 문제는 이 영상이라는 것이 유물에 직접 가공을 가하지 않기에, 그 영상을 만든 주체가 보는 관점이 기획 과정에서 투영될 가능성이 더 높아졌다는 것이다. 특히 현대사와 연관된 박물관은 이러한 문제에서 더더욱 자유로울 수 없게 되었다. 어떻게 보면 기술의 발전이 반드시 순기능을 하지는 않는 예시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식민지를 이해하는 또 다른 창구 중 하나는 대중매체이다. 콘텐츠 산업이 사회로 나와 기능할 수 있는 판로를 열었다는 점은 순기능이 맞다. 이는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바이다. 사람들은 대중매체로 콘텐츠를 보고 싶어 하지, 전문 연구서적을 보고 싶어하지는 않는다. 하다못해 연구자들도 그런 책을 항상 보지는 않는다. 쉴 때면 그들도 넷플릭스 보고, 영화관 가고 할 것 다 한다. 그리고 그렇게 다양하게 해석을 시도하는 것은 여러 가지 관점을 제시한다는 점에서 ‘사고하는 학문으로서의 역사’가 지향하는 바에 부합하기도 한다. 그 점에서 콘텐츠 산업이 식민지를 다루는 점은 분명히 나쁘게만 볼 것은 아니다.
문제는 역사가 자원이 되면서 발생한 위험성이다. 1990년대부터 지방자치제 시행과 맞물려 지역의 향토사를 연구하는 사업이 활발해졌는데, 그 과정에서 지역 단위의 근대사 박물관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문제는 이 과정에서 박물관이 일종의 관광자원이 돼버렸다는 점이다. ‘관광자원이 되는 것이 왜 문제일까? 사람 많이 오는 거는 관심 가지는 것이니까 좋은 것 아닌가?’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관심을 가지는 것과 그것에 대해 고민해 보는 것은 또 다른 문제이다. 예를 들면 ‘경성’이라는 단어가 거리 곳곳에 있는 레트로 분위기의 가게에서 사용되는 것 등을 들 수 있겠다. 사실 경성이라는 말은 식민지 시기에 조선의 수도를 일본제국의 일개 행정구역으로 격하해 버리면서 만든 단어다. 이전까지는 한성, 한양, 서울이라고 불렀지, 경성이라는 용어는 쓰인 적이 없었다. 하지만 이 용어를 마케팅에 쓰는 사람들은 그걸 모르고 시대 분위기를 내는 용도로만 쓰고, 대다수 사람들 역시 비슷하게 별다른 의심 없이 이를 수용한다. 바꿔 말하면 접근성은 높이되 진지한 사고가 필요한 주제를 ‘그땐 그랬지’ 식의 추억팔이 장사의 수단으로 변질시킬 위험성이 매우 높아졌다는 것이다.
뭐, 아무튼 그렇다. 생존 신고하는 겸 졸업논문 연구 끝나고 여유가 조금은 생겨서 쓴 글이긴 하지만, 박물관에 가거나 콘텐츠를 볼 때 이러한 점을 생각하면 본다면 괜찮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 써본 글이다. 그리 알아주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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