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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한 역사학의 일제강점기 노농(勞農)운동 연구 검토-1920~1930년대 노농운동 연구 비교를 중심으로- (2)

역사

by HUMAN H 2024. 5. 9. 02: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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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1920~1930년대 일제의 식민지 농업·공업정책 기조와 남북한의 일제강점기 노농운동 인식

 

  앞서 남북한의 학술연구기관 성립 과정과 북한의 역사학 연구 전개 과정을 논하였다. 그렇다면, 1920~1930년대의 노농운동을 바라보는 남북한의 인식은 어떠한가? 이를 확인하기 위해서는 우선 1920~1930년대 조선총독부의 식민지 농업·공업 정책 기조에 접근해야 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1920년대 조선총독부의 농업정책은 산미증식계획과 면화 생산 및 양잠 장려, 축우(畜牛) 개량 및 증식으로 정리할 수 있다. 1910년대 자본주의 발전에 따른 도시인구 급증과 미곡 수요 증가, 미곡 투기업자들의 매점매석에 의한 식량부족에서 비롯된 1918년 ‘쌀 소동’은 일제가 조선을 식량 공급기지로 재편하는 요인 중 하나로 작용했다. 또한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성장한 일본의 면방직 공업과 1차대전 전후 서구 국가의 방적업 부활에 따른 면화 가격 증가에 따라, 일본은 조선을 방적·방직 기지로 재편할 필요 역시 느꼈다. 이에 1921년 정무총감 미즈노 렌타로(水野錬太郎, 1868~1949)를 위원장으로 한 산업조사위원회는 ‘조선 산업정책은 일본 산업정책의 방침을 따르며, 일본과의 관계를 고려해 조선에서의 산업정책을 추진한다’는 방침을 발표하였다. 이미 1920년부터 실시한 산미증식계획은 이 같은 일반방침에서 시행 근거를 얻었고, 관개시설 대규모 개선과 토지개량을 주 형태로 하여 미곡 증산을 시도하였다. 동시에 일제는 1919년 수립한 육지면(陸地棉) 재배 장려 10개년 계획에 따라, 농경지를 육지면 재배지역으로 전환하는 형태로 면화 재배를 확대하려 시도하였으며, 생산된 면화의 효율적 수거를 위해 지방에 면작기술원 배치와 면작 조합 결성을 진행하였다. 

일제강점기 정무총감을 역임한 미즈노 렌타로. 그는 실질적으로 '문화통치'를 이끈 자이기도 하지만, 관동대지진 당시 유언비어를 유포해 관동대학살을 조장한 장본인이기도 하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조선 농촌에서 발생한 변화는 다음과 같이 정리된다. 첫째, 조선 농촌의 역할이 일본 자본주의의 원료기지이자 상품시장으로 한정되면서, 조선의 농업체계가 붕괴하였다. 특히, 관과 지주의 활로를 보증하면서 일본발 고리대자본이 투자된 결과, 반(半)봉건적 소작 관계의 확대·재생산, 일본인 지주들의 토지 겸병 촉진이 진행되었다. 둘째, 미곡 통제 및 곡가 인하정책, 조세부담 및 수리조합비 증가 등으로 농민에 대한 착취가 강화되었으며, 농민들은 만성적 식량부족과 극도의 빈곤 상태로 내몰리게 되었다. 이는 지주제의 발달과 농민층의 하향 몰락을 유도했는데, 자작농과 자소작농의 소폭 감소와 소작농과 순화전민(純火田民)의 대폭 증가로 발현되었다. 또한 지주제 강화 과정에서 등장한 소작 기간 단축, 소작료율 인상, 소작농에게 전가하는 기타 조세부담, 소작료 이외 각종 수수료 요구 등으로 인해 수탈이 가중되었고, 이는 조선 농민의 빈궁화·걸인화 현상을 심화시켜 반강제적 이농(離農)을 유도하였다. 이러한 국면은 1920년대 소작쟁의와 노동쟁의의 비약적 증가의 원인으로 작용했다고 할 수 있다. 

 

일본으로의 수출을 위해 쌓여있는 군산항의 쌀가마

 

  1930년대에 들어서며, 일제의 농업정책은 파쇼적 체제 구축을 위한 억압 강화와 농촌진흥운동 실시로 변화했다. 세계 대공황에 의한 경제적·계급적 위기 타파를 위해 일제는 식민지 수탈을 강화함과 동시에 침략을 통한 시장개척을 도모했고, 이는 치안유지법의 강화와 경찰기구 증가로 발현되었다. 이와 함께 조선총독 우가키 카즈시게(宇垣一成, 1868~1956) 주도하에 실시된 농촌진흥운동은 조선 농촌을 구제하겠다는 명목하에 1931년 산미증식계획을 중지하고 1933년부터 각급 행정기관에 농촌진흥위원회를 설치하여 춘궁 조절, 현금수지 균형화, 부채 정리 등을 시행하면서 자력갱생과 농가의 자각을 강조하였지만, 이는 농촌 빈곤의 근본 원인이었던 일본인 지주 중심의 대토지 사유제를 옹호 및 보강했다는 점에서 본질적으로 지주계급을 옹호한 정책에 불과했다. 이러한 지주계급 옹호는 1930년 지방자치제 개정에 따른 지방 유지 입후보와 식민 지배의 대리자로서의 지주포섭 과정에서도 드러났는데, 이 과정에서 결합한 계급 모순과 민족 모순은 노동자와 농민의 적극적 투쟁을 유도했다.

 

  한편 1920년대부터 회사령 폐지에 따른 일본기업의 유입과 경공업 중심 산업화의 시작에서 본격적인 노동계급 형성이 진행되었으나, 기본적으로 일제의 주요 노동정책 기조는 통제였다. 이는 자본주의 초기 발전단계에서의 일반적 현상이기도 하나, 일제의 농본 이데올로기와 함께 존재한 노동자를 향한 제국주의적 인종차별 역시 이러한 통제 중심 정책의 원인이었
다.* 이러한 상황에서 일제의 노동정책은 1930년대 말 이전까지 사회산업 중 일부로 간주되거나, 필요시에만 협상·무력 진압 등을 통해 한시적으로 대처하는 양상을 띠었다. 또한 일본 본토와는 별개로 생산성의 관점에서 이뤄진 광산노동자에 대한 일부 조치를 제외하면 노동자에 대한 사회보장 정책은 전무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1920년대부터 진행된 경공업 중심 산업화, 농촌의 빈곤 심화에 따른 농민의 대량 이농과 일용직 노동자로의 전환, 일제 재벌과 대공황에 의한 수공업자·소상인·소규모 기업가의 몰락과 노동계급으로의 합류, 독점자본에 의한 자본집중과 노동계의 상대적 과잉인구 형성은 노동계급의 실태를 수면 위로 떠오르게 하였다. 일반적인 조선 노동계급의 경우, 평균 12시간을 초과하는 노동과 최하층 생활도 유지할 수 없는 수준의 저임금, 셋방·행랑방·토막집·공장합숙에서의 거주 등 전반적인 생활 여건에서의 열악한 처지를 벗어나지 못했다. 

 

* 이는 조선총독부에서 노동정책을 주관한 기구의 변천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노동문제는 1921년부터 공제 개념에 입각하여 총독부 내무국 사회과가 담당하였으며, 1932년 사회과가 내무국에서 학무국으로 이관된 이후에도 노동문제는 노동시장 관련 업무가 주(主)인 사회사업 개념에 머물렀다. 노사관계와 관련된 업무는 경무국 보안과 담당이었는데, 이는 사실상 노동문제에서의 주요 개입자이자 행위자는 경찰이었다는 것을 방증한다. 노동문제에서의 경찰의 통제는 1938년 경제경찰제도 도입으로 더 강화되었다: 김경일, 「일제의 노동정책과 노동운동」, 『동양학』 41권, 2007, pp.285~287에서 재인용.

 

일제강점기 경성방직 공장
일본 노구치 재벌이 세운 조선질소비료공장. 흔히 흥남질소비료공장이라 부르는 그것 맞다.

 

  이러한 조건 속에서 노동자와 농민들의 반응은 노농운동으로 발현되었다. 1920년대~1930년대의 노농운동은 전술(前述)한 조선총독부의 식민지 농업·공업정책 기조 변화에 따라 서로 다른 양상으로 나타났다.

 

  검사제 반대운동·조선농회 반대운동 등 다양한 양상을 띠었다. 또한 계몽 지식인과 지주가 중심이 되어 농민단체를 주도하던 이전과 달리, 민족적·계급적 각성에 따라 농민 스스로가 농민운동의 주체로 떠오른 것 역시 이 시기부터의 일이었으며 참가 농민의 스펙트럼 역시 자작농· 중소지주(中小地主)·자소작농(自小作農)·소작농·화전민으로 매우 넓었다. 1920~1925년까지 소작농의 직접투쟁이 주류였던 농민운동은 농민조합을 통해 강화·확대된 대중성과 계급적 지평에 의하여 ‘소작조합-농민조합-혁명적 농민조합’으로 발전하며, 농민운동 주체들의 주체적 조직 개편으로 확대되었다. 또한 1920년대부터 유입되기 시작한 사회주의 역시 농민운동에서 사상적 동력 역할을 수행하였다. 특히 1920년대 말 코민테른의 12월 테제에서 언급된 토지혁명론은 농민이 사회주의 세계관을 주체적으로 수용한 계기가 되었으며, 농민 주체의 역량 증가와 혁명적 농민조합운동의 대두로도 연결되었다.

 

  운동노선에서 증가한 다양성과 이념·조직상의 발전, 계급적 대결 구도의 강화, 농민층의 분해 가속화, 소작쟁의의 격증으로 발현된 1920년대 농민운동은 1930년대에 이르러 또 다른 국면을 맞았다. 1930년대부터 시작된 일제의 대륙 침략전쟁에 따라 파쇼적 체제가 구축·강화되면서 사회운동 전반에 대한 탄압 강도가 증가하였고, 이에 따라 농민운동은 사회주의 계열 중심의 농민조합운동과 종교계 중심의 개량적 농민운동이라는 두 부류로 나뉘어 전개되었다. 

 

  농민조합운동의 경우, 사회적 탄압 강도 증가에 따라 종래의 합법적 투쟁에서 비합법적 투쟁으로 노선을 변경했는데, 혁명적 농민운동에 결정적 역할을 한 것은 코민테른의 12월 테제였다. 이에 따라 사회주의자들은 농민의 투쟁성을 민족해방전선으로 유인하는 한편, 지도부 중심의 당 재건 운동에서 벗어나 대중성을 확보하여 아래로부터의 통일전선을 만들어 조선공산당 재건의 토대를 마련하고자 노동자-농민 계층에서의 하부조직 결성을 시도함과 동시에, 농민의 경제적 이익 옹호 이상의 토지혁명과 민족혁명 과제를 해결하려 시도하였다. 이 당시 혁명적 농민운동은 수세 불납·지세 불납·삼림조합을 향한 투쟁·관공서 습격 등 합법적 수단과 비합법적 수단을 병용하여 식민지 수탈경제 체제를 향한 직접적 도전으로 발현되었으며, 강연회·야학·독서회를 통해 반제(反帝) 계급의식과 항일의식을 고취하는 교양 사업은 민족해방운동의 주요 부분이 되었다. 1930년대 전반기의 농민운동은 계급 대 계급 전술과 민족 대 민족 전술에 기초하여, 근본적인 토지개혁을 향한 투쟁으로 발현됨과 동시에 일본인 지주로까지 투쟁 대상을 확대하여 민족해방운동에서의 역량 결집에 이념적 당위성을 제시하였다. 이러한 혁명적 농민조합운동은 사회적 탄압이 강화된 상황에서도 생존권과 정치적 권리 쟁취를 위한 투쟁을 이어나간 과정이기도 했지만, 지도부와 일반 구성원 간의 간극 문제는 무시할 수 없는 문제였으며 농민운동의 중추로 내세운 빈농(貧農)계층과 운동의 목표였던 조선공산당 재건을 강조하는 과정에서 농민운동의 계급적 지평을 협소하게 만들기도 하였다. 이러한 과정은 민족주의 계열 세력과 소부르주아 계층을 민족해방운동 대열에서 제외하면서 힘이 분산되는 결과를 낳기도 하였다.

 

  한편, 기독교와 천도교 중심의 개량적 농민운동은 조선농민사·YMCA·YWCA가 중심이 되어 일상이익 획득운동과 협동조합활동을 전개하였다. 개량적 농민운동은 실용지식 중심의 야학과 생활개선, 문자 보급 등 브나로드(v narod) 운동으로 대표되는 계몽운동을 중심으로 하여 농민의 생활개선에 직접적으로 도움이 되고자 하였으나, 정치적 투쟁과 경제적 투쟁을 효과적으로 결합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었다. 또한 합법적 투쟁을 고수하는 과정에서 활동 영역을 스스로 축소한 것과 함께, 결과적으로 혁명적 농민운동 세력의 견제 역할을 담당하며 일제의 농민개량화 정책에 편승했다는 점에서 한계를 보이기도 하였다.

 

  농민운동과 함께 전개된 노동운동 역시 계급적, 민족적 저항의 요소를 가지고 전개되었다. 1920년대 노동운동은 근대적 산업노동자의 증가와 생활지표에서의 열악한 조건이 노동운동 발전의 객관적 기반이 되었으며, 대중운동 발전에서 결사체를 만들고 이념적 동력원으로써의 역할을 한 사회주의의 보급 역시 노동운동 발전의 기반으로 작용하였다. 특히, 농촌경제의 파탄에 따른 극단적 빈곤과 저수준 공업화가 결합된 기형적 산업화는 소작농 출신의 다수 일용직 노동자가 농민운동의 경험을 노동운동에 연결하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1920년대 노동운동은 노동조합 중심의 활동과 파업투쟁을 두 축으로 하여 전개되었다. 노동조합 중심의 노동운동은 전국적 노동조합 및 산업별 노조 조직, 공장 내 노조 활동과 복지사업, 노동자 교육·연예-체육활동·언론-출판 활동·봉건적 제도 및 문화 타파 운동 등 다양한 형태로 전개되었다. 한편, 파업 투쟁은 공격적 성향과 경제적 투쟁의 성격을 강하게 띠다가 1920년대 후반부터는 투쟁의 지역 범위를 확대하는 한편, 투쟁의 지구성과 계급적 연대성을 강화하는 형태로 발전하였다. 1920년대에 발생한 노동운동의 주요 특징은 조선노농총동맹이나 조선노동총동맹과 같은 전국단위의 노동자조직의 출현, 친목 도모 등 상호부조적 단체에서 공동의 경제적 이익쟁취를 위한 투쟁 단체로의 발전, 1925년 치안유지법 발효 이후 노동운동이 경제투쟁-계몽운동에만 머물 수 없음을 자각하며 자본가를 옹호하는 식민통치 권력을 성토하는 노동해방과 민족운동 간의 결합으로 정리할 수 있다. 1930년대의 노동운동 역시 전시체제에 기반한 일제의 탄압이 강화되면서 당대 농민운동과 유사한 전개 과정을 밟았다. 합법적 노동운동 단체도 존속이 불가해지면서 비합법 노동운동의 조류가 등장한 것이다. 1932~1936년 동안 공장 노동자들을 규합하여 조선공산당 재건을 도모했던 이재유(李載裕, 1905~1944) 그룹의 혁명적 노조운동이 대표적인 예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이 같은 비합법 비밀결사 형태의 지하활동은 1930년대 노동운동의 주요 형태였으나, 대부분은 목표 달성에 실패하였다. 일제의 탄압이 강화되면서 전체적으로 활동에 지장이 생긴 것과 함께, 전통적 온정주의와 근대적 조직을 결합한 어용노조의 등장과 같은 개량주의와 패배주의 경향이 나타난 것이 그 원인이었다.36) 이러한 경향에 대항하여, 노동운동계는 세계 노동운동의 경향을 따라 직업별 노조를 산업별 노조로 통합함으로써 직능 숙련도와 직업 특수성에 따른 이해관계의 상이함을 극복하고자 하였다. 동시에 민족차별·제국주의·전쟁에 반대하는 구호를 내세우면서 노동조합의 목적과 강령을 이전보다 구체적인 형태로 다듬는 작업을 통해 정치투쟁적 요구와 성격을 강화하였다. 1930년대 노동운동의 특징은 국제 공산주의 운동과의 연계 아래 마르크스-레닌주의의 일관된 영향력 행사, 개량주의 성향에 반대하는 혁명적 노동운동의 주류화(主流化)**, 혁명적 노동운동과 연관된 민족해방운동과 경제적 요구 간의 결합, 일상투쟁에서 더 나아간 자본가와 식민권력에 대항하는 무력투쟁으로의 발전,*** 노동쟁의의 폭력화로 정리할 수 있다.

 

** 노동운동의 좌경화는 농민운동에서와 유사하게, 운동의 영향력과 지속성을 보장하였으나 계급적 면에서 운동의 유연성을 하락시키고 비판을 통한 발전 가능성을 차단했다는 한계 역시 가졌다: 국사편찬위원회 편, 『한국사 50: 전시체제와 민족운동』, 서울:탐구당문화사, 2001, pp.149~150;p.160에서 재인용. 

*** 함경도 일대에서는 좌익계열 노조운동과 조-만 국경지대에서의 무장투쟁이 밀접하게 연결되었으며, 만주의 항일무장투쟁 세력과 조-만 국경지대의 노동자들이 유대를 맺으면서 무장투쟁을 전개하기도 하였다: 유혜경, 「일제시대의 노동운동 노동운동의 성격」, 『경희법학』 56권 4호, 2021, pp.512~513에서 재인용

 

 

  그렇다면 남북한은 1920~1930년대 노농운동을 어떻게 바라보았는가? 이번에는 전술(前述)한 바와 같이 북한의 역사학 연구가 학술적 성과를 냈던 1950~1970년대 연구를 중심으로, 남북한이 노농운동을 어떻게 바라보았는가에 대해 논하고자 한다.

 

  해방 이후 남북한 학술원과 과학원은 각기 다른 길을 갔으나, 시작에 있어서는 공통점 역시 보유하였다. 그것은 제국대학으로 대표되는 일본발 근대학문체계를 습득한 인원이 주류였던 학계의 상황과 일제로부터의 해방을 목표로 삼았던 시대 인식, 그리고 해방 이후 정치권으로부터의 체제의 정통성과 우월함을 확인하는 역사연구 요구였다. 공통점 중 하나였던 ‘정치적 이유에서의 역사연구 요구’가 결정적 차이를 만들었다는 점은 상당한 아이러니일 것이다. 

 

  역사학에서 일제의 영향력을 청산하고자 한 시도는 해방 이전부터 존재하였고 해방 이후엔 본격적인 논의가 이뤄졌으나, 그것이 실제 연구에 반영되는 과정에서 남북한은 차이를 보였다. 그것을 확인할 수 있는 예 중 하나가 일제강점기 사회 성격과 노농운동 연구였다. 노농운동 연구의 배경 격이었던 일제강점기의 사회경제적 성격에 관한 연구는 백남운의 연구에서 출발하였다. 백남운은 유물론적 역사발전론에 입각하여 봉건제 결여론과 노예제 결여론으로 대표되는 정체성론을 반박함과 동시에 마르크스의 아시아적 생산양식과 아시아 정체론을 비판하였다. 그는 사적유물론을 수용하여 조선사 연구에 보편성을 확립하고자 시도했는데, 이 점에서 백남운은 일본이 독일 역사학파의 영향으로 특수한 경제사관을 갖게 되었으며, 이로 인해 ‘일본은 제(諸) 민족과 국가에 일일이 특수적 고찰을 해야 하는 무능한 행위를 하고 있다’는 비판을 가했다.39) 개별 국가의 발전과정에서 나타난 특수성을 본질적 특수성과 동일시하는 식민사학에 비판을 가하면서, 백남운은 조선경제사의 사회적·역사적 발전과정을 법칙화하였다. 조선사회가 정체되었다는 인식을 극복하기 위한 백남운의 주장은 식민사학 극복을 위한 토대를 마련하면서 신민족주의 사학과 마르크시즘적 사회경제사학, 문헌고증사학의 해방 이후 식민사관 극복 시도로 연결되었다. 

 

백남운의 대표작 <조선사회경제사>

 

  그러나 해방 이후 남북한 역사학은 서서히 차이를 보이기 시작했다. 결정적 이유는 민족분단이 학문분단으로 연결된 것에 있었다. 반제 반봉건을 기치로 내세운 남한의 신민족주의 사학이 마르크시즘 사학을 ‘공식사관에 사로잡힌 반(反)역사적 사학’이라 비판했다고 할지라도, 마르크스의 아시아적 생산양식에서 근원을 찾는 이상 이데올로기적 공격으로부터 자유로울 수는 없었다. 이러한 점은 마르크시즘적 사회경제사학에서도 동일했다. 결정적으로 6.25 전쟁 경험과 전중(戰中) 신민족주의 계열 사학자들의 납북에 따른 남한에서의 연구인력 소멸에 의해, 1950년대에 이르면 마르크시즘 사학의 자취는 소멸하였으며 신민주주의 사학은 그 자취만을 남긴 채 종래의 문헌고증사학이 한국사학계의 주류가 되었다. 해방 이전 관학사가들의 이론이 중심이었던 문헌고증사학의 영향력 하에 식민주의 역사관은 계속 영향력을 행사하였고, 이러한 기조는 1960년 4.19 혁명 이후부터 변화하였다. 

 

  4.19 혁명을 기점으로 사회변화에 대한 본질적 문제가 제기되면서 지식인들은 이전 사회에 대한 대안을 모색하고자 하였고, 연구의 자유와 같은 여건이 보장된 전환점 역시 4.19 혁명이었다. 이 과정에서 제국주의 시대의 역사관을 비판할 대안을 모색하고자 한 한국사학계는 식민지배를 위해 조직된 논리 비판을 새로운 한국사학 구축의 출발점으로 삼았다. 이때 최우선 과제로 제시된 것이 한국사의 체계화였고, 그 과정에서 한국사학계가 관심을 보였던 것은 시대구분이었다. 내재적 발전론이라는 용어가 이 당시 등장하진 않았지만, 기존의 왕조 중심 사관이나 정체성론에 기초한 식민사학에서 벗어나 독자적인 시대구분의 틀을 제시한 것이 바로 1960년대의 내재적 발전론과 자본주의맹아론이었다.**** 

 

  다만 1970년대 국사편찬위원회의 『한국사』 편찬계획에서 ‘각 시대에서의 민중의 활동과 참여를 부각시킨다’는 점이 명시되었지만,41) 이 당시까지 내재적 발전론이 주로 다룬 것은 근대사회로의 이행 과정과 자본주의의 발전 가능성에 관한 것이었다. 이에 대한 실증적 연구는 경영형 부농의 개념과 농민층의 성장, 수공업과 광업의 발달 등 조선 후기 사회경제사 연구에서 집중적으로 이루어졌다. 본격적으로 민중을 근대 형성의 주체로 간주하기 시작한 관념이 민중론의 형태로 드러난 것은 1970년대부터였다. 이러한 경향은 자본주의 맹아론의 한계 지적과 1980년 광주민중항쟁을 통해 민중의 사회적 진출이 분명해지며 등장한 사회구성체 논쟁, 변혁론 논쟁을 통해 민족과 계급의 현실을 극복할 변혁의 주체로 민중이 설정됨과 동시에 민중의 형성과정과 민중의 역할 조명 진행에 따른 노농운동 논의로 연결되었다. 「한국농민운동사」(유세희, 1978)와 『일제하 한국농민운동사』(조동걸, 1979)로 대표되는 1970년대 말의 일제강점기 민중운동 연구는 당대의 노농운동을 ‘근대 시민사회를 지향한 부르주아적 민족주의운동, 항일 독립운동의 일환’으로 이해하였으며, 이러한 연구를 바탕으로 하여 노농운동에서의 시기 구분과 성격 규명 등의 연구가 진행되었다. 

 

**** 내재적 발전론이라는 용어 자체는 1980년대에 등장한 것으로, 민족의 주체적·내재적 발전과정을 합법칙적으로 파악하려는 한국사학계의 움직임을 명명한 것이었다. 다만 명명 이전에도 내재적 발전과정과 내적 발전에 주목한 연구 경향이 존재하였고, 후대에 와서 이를 내재적 발전론이라 명명한 것이다: 염정섭, 「1960~70년대 조선시대 농업사 연구와 내재적 발전론, 근세사회론」, 『한국사연구』 184호, 2019, p.17에서 재인용

 

 

  한편, 북한에서는 마르크시즘 사학에 기반한 과학적·실천적 역사학에 입각한 주장이 비교적 빠르게 진행되었다. 북한은 역사학에서의 과거청산에서 마르크시즘적 관점을 적극적으로 이용하였는데, 초창기에 강조한 기준은 ‘민족-반민족’보다는 ‘봉건-반(反)봉건’, ‘민주주의-전체주의’였다. 해방 이후 한국 학자들의 식민사관 추종을 ‘사생아적 개념’이라며 강도 높게 비판했던 김광훈과 같이, 마르크시즘 사학자들은 문헌고증적 사실 나열과 왕조사에 기반한 순환사관, 국수주의 역사관, 영웅사관을 반동적 사관이라 비판하며, 유물사관과 사회구성체론을 토대로 한국사 발전의 필연적 합법칙성을 드러내고자 하였다. 

 

  이러한 기조가 변화한 것은 1950년대부터였다. 이전까지 사실상 언급되지 않았던 민족의 개념이 도입되며 『조선통사』(사회과학원, 1958) 서문에서 드러나는 바와 같이 사회적 개념의 인민보다는 민족투쟁의 역사를 강조하기 시작한 것이다.44) 그러나 역사발전론이 민족투쟁사에 압도당한 것은 아니었는데, 사적유물론의 주체적 적용을 강조하는 과정에서 일제강점기의 사회경제적 성격을 규명하려 한 식민지반봉건사회 논의가 그 예라 할 수 있다. 북한은 일제강점기를 외래 자본주의 침략자에 의해 조선에 이식된 자본주의사회로 이행하며 등장한, 순수한 봉건사회나 자본주의사회가 아닌 식민지 초과이윤 제공을 위해 재편성된 기형적 사회로 정의하였다.*****

 

***** 다만, 식민지반봉건사회론 논쟁에서는 근대사회의 성격 연구를 계속해야 할 필요성을 열어놓았는데, 이 문제가 비자본주의 내지는 자본주의에서 사회주의로의 이행을 결정하는 문제임과 동시에 일제강점기의 자본주의적 생산관계가 독립적 경제형태로서의 토대를 만들었는가에 대한 의문을 남겨놓았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일제강점기 연구는 조선민족 해방투쟁의 원칙적 노선과의 연결을 거쳐, 반제반봉건투쟁으로서의 노농운동 연구로 연결되었다. 이러한 경향은 1956년 8월 종파사건에 의해 『조선민족해방투쟁사』가 폐기되고 항일무장투쟁의 전통에 입각한 민족해방운동사를 중심으로 편찬된 『조선근대혁명운동사』가 공식 역사서로 채택되는 과정에서도 크게 변하지 않았다. 사회주의 혁명의 당위성 확보를 위해 역사적 경험에서 혁명 전통을 찾으려는 노력은 인민의 투쟁에 관심을 가지게 하였으며, 그 과정에서 북한 역사학은 사적유물론과 민족해방투쟁 서사에 기반한 역사인식을 통해 해방 이전 관학 중심의 식민사학을 빠르게 대체하였다. 이러한 점에서 진행된 북한의 일제강점기 노농운동 연구는 「1924~25년 황해도 재령 《나무리》 농민들의 투쟁」(김인걸, 1957)을 시작으로 하여, 노동자 총파업과 농민운동의 양상 변화 연구로 확대·심화되었다. 

 

  식민지반봉건사회론으로 대표되는 식민지 사회 정의에서 출발한 북한의 노농운동 연구는 농민과 노동자 계급에서 사회구성 및 변화의 동력을 탐색하려 한 사회주의적 역사서술의 특징이 잘 드러난 연구 중 하나였다. 하지만 동시에 당시 조선인의 사회경제적 처지를 다루면서 북한 역사학은 조선인 농민과 노동자를 향한 일제의 계급적·실생활적 착취 규명에 집중하였으며, 계급적 관점에 입각한 논의와 함께 노농운동이 민족해방운동의 일환으로 전개되었다는 테제를 정립하는 등 민족 강조에 있어 남한과 유사한 점을 보이기도 하였다. 

 

  일제강점기 노농운동을 다룬 북한의 역사서술은 공식 역사서 『조선통사(하)』 18장, 『조선근대혁명운동사』와 정기간행물 『김일성종합대학학보: 력사·법학』, 『력사과학』을 통해 확인할 수 있는데, 이를 종합해보면 북한의 노농운동 연구는 다음의 특징을 보인다고 할 수 있다. 첫째, 노농운동 연구를 관통하는 사상은 마르크스-레닌주의이다. 북한은 1920년대 마르크스- 레닌주의의 도입을 “민족해방운동의 사상적 무기를 획득한 첫 시기”로 규정함과 동시에 계급적 관점에서 식민지사회의 성격과 민족해방운동을 규정하였다. 여기에서 혁명의 주력이 될 수 있는 존재는 사회주의 사상을 통해 결집한 농민과 노동자였다. 이러한 관점에서 일제와 지주, 예속자본가는 봉건주의와 제국주의의 총본산이자 일제와의 봉건적 관계하에서만 생존할 수 있는 ‘조선인민과 민족해방투쟁의 적’이며, 민족자본가 역시 반제(反帝) 성향을 가지나 계급적 제한성과 미약한 정치·경제적 역량으로 인해 혁명의 주력군은 될 수 없는 존재로 규정되었다. 이와 같은 계급적 규정은 소부르주아 지식인 계층의 한계와 개량주의적 민족주의에 대한 비판에서도 동일하게 나타나는 바라고 할 수 있다.

 

  둘째, 노농운동의 전체적 평가에 있어 제한성을 인정하되 계급투쟁·반제투쟁·대중투쟁으로서의 의의를 고평가하였다. 제한성을 논하는 중심 요소는 지방분산적 전개, 계급 간의 연대 부족, 레닌의 전위당 이론에 입각한 사상적 지도 세력 부족의 문제이며, 의의 언급에 있어 중요하게 다루는 점은 제한성에도 불구하고 투쟁이 광범위하고 기세가 높았다는 점이었다. 이러한 점에서 북한은 원산총파업을 노동자들이 단결하여 자체 규찰대를 통해 일제와 자본계급의 분열 책동을 분쇄한 전 인민적·전 계층적 투쟁이었다는 데에 의의가 있다고 고평가하였다. 또한 농민운동의 의의를 전근대기부터 오랜 전통을 가진 대중운동을 계승하려 했다는 점에서 탐색한 점 역시 주요 특징이라 할 수 있다.

 

  셋째, 1930년대 노농운동 연구에 있어 북한은 노농운동과 항일무장투쟁의 연계 강화를 강조했다. 이는 북한이 정권의 시원(始原)과 정당성을 찾는 항일무장투쟁과 마르크시즘적 역사발전론을 연결하려는 시도의 대표적인 사례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북한은 1930년대 노농운동의 계급적 의의 그 자체를 강조하며, 당시 운동에서의 한계를 ‘종파주의’ 외에는 거의 다루지 않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러한 점은 역사 연구가 과거를 대상으로 하는 정치임을 보여주는 일례 중 하나일 것이라 사료된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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