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서언: 북한의 역사학 연구를 바라보며
6.25 전쟁이라는 이데올로기 전쟁 이후, 남북한은 서로 다른 길을 걸으며 서로에 대한 공개적인 학술 통로 역시 차단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도 상대에 관한 정보를 얻으려는 노력은 존재했고, 정보 획득 과정에서 북한의 역사 연구는 남한 역사학에서 인식변화의 열쇠 역할을 하기도 했다. 고대사회 성격 논쟁, 근대적 부르주아 계급운동으로서의 갑신정변 성격 논의, ‘동학농민운동’의 성격 논의와 명명, 식민지반(半)봉건사회론 논의가 남한 학계에 미친 영향이 그 예라 할 수 있다. 동시에 북한의 역사 인식은 1980년대 한국 학생운동의 노선변화와 민중사학의 성립에도 일정 부분 영향을 미쳤다는 점에서 결코코 도외시할 수는 없을 것이다. 1980년대 말에서 1990년대 초부터, 북측 자료를 합법적으로 볼 수 있는 창이 개방되기 시작하면서, 한국사 연구자들을 중심으로 하여 북한 역사학에 관한 연구와 분석이 집중적으로 이뤄졌다. 국사편찬위원회가 2001년부터 2004년까지 총 9권으로 발간한 『남북역사학논총』 시리즈는 남한에서의 북한 역사학 관련 연구성과와 북한에서의 연구 소개를 총망라한, 대표적인 북한 역사학 조명의 결과였다. 『남북역사학논총』이 출간된 이후에도, 한국사 연구자들에게 있어 북한의 역사학은 주된 연구 소재 중 하나였다. 2010년대 이후 등장한 사학사적 접근에 입각한 연구가 그중 하나로, 이에 관한 연구로는 봉건제 개념과 국가성립을 중심으로 한 북한 역사학과 소련 역사학의 시대구분론 관련 연구(조호연, 2021)가 있다.
의미에서의 언어적 요소를 차치하더라도 북한 역사학에 접근함에 있어, 강력하게 느껴지는 장벽은 서술체계와 논조에서의 낯섦일 것이다. 이는 북한이 내세우는 역사학 접근방법과 성격 정의가 일차적 원인이라고 할 수 있다. 북한은 역사학을 사회과학의 분과로 분류하면서, 역사학을 ‘대중교양’과 ‘혁명 건설에서의 복무’를 임무로 하는 학문이자 체제 안정에 봉사하는 사상사업의 주요 도구로 규정한다고 알려져 있다. 이는 소련의 마르크시즘 사학자 미하일 포크롭스키(Mikhail. N. Pokrovskii)가 내세운 테제, ‘역사란 과거를 대상으로 하는 정치’를 기본으로 하며, 현실정치를 정당화하는 기제로써 역사학이 작용함을 시사한다. 특히 1970년대 이후 북한 역사학의 정체기는 남한학계에도 알려진 바와 같이, 주체사상에 기반한 사상통제의 강화와 함께 민족지상주의와 마르크시즘의 기형적 혼합이 본격적으로 일어난 시대였다. 이는 1956년 ‘8월 종파 사건’, 1961년 9월 제4차 조선로동당 대회를 기점으로 하는 학술영역에서의 애국주의 혼합이 노골적으로 가시화된 결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북한의 역사 연구가 체제를 지탱하는 이념적 도구에만 머문 것은 아니었다. 북한의 역사 연구는 한국사 연구에 있어 상당한 성과를 남기기도 했는데, 대표적으로 한국사를 재정립하는 과정에서 등장한 삼국시대와 중세 봉건제 간의 관계 논쟁, 근대사회의 시작과 중간단계에 대한 근·현대사 시대구분 논쟁, 식민사학 비판과 마르크시즘적 역사 발전론에 입각한 조선 후기 사회·경제적 변화 양상 연구를 그 예로 들 수 있을 것이다. 또한 북한의 고대 한일관계사 연구는 남한에서도 시대적 과제로 인식되었던 식민사학 타파라는 공통분모를 가졌다는 점에서, 그 역사적 의의를 완전히 무시할 수 없을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 근거하여 본 연구는 다음의 사항을 취급하고자 한다. 첫째, 1920년대~1930년대 노농운동을 중심으로 하여 북한 역사학의 연구 방향을 확인한다. 둘째, 이를 통해 북한 역사학의 성격은 무엇이며, 특수성에는 어떤 것이 있는지 고찰한다. 단, 이 과정에서 특수사관이 갖는 위험성을 경계하며 연구를 진행해야 할 것이다. 셋째, 기억과 재현에 있어 남한 역사학에 미친 영향과 서로 간에 공유할 수 있는 연결점이 있다면, 공유요소가 무엇인지 탐색한다. 넷째, 북한 역사학이 1920~1930년대의 노농운동을 취급하는 방식과 동 시기에 대한 남한 역사학의 인식을 비교함으로써 역사적 재현의 방식에 대해 고찰하고자 하며, 이를 통해 남북한 역사학의 시각에 대한 성과와 한계를 논할 예정이다.
Ⅱ. 남북한의 일제강점기 노농운동 연구와 해석
1. 남북한 학술기관 성립과 북한의 역사학 연구 전개과정
북한에서의 역사학 정의는 조선사회과학원 력사연구소에서 편찬한 『력사사전』(1971)의 표제어 ‘력사학’에서 그 내용을 확인할 수 있다. 『력사사전』은 역사학을 ‘인류사회의 력사를 대상으로 하고 그 발전의 복잡한 력사과정을 합법칙적인 통일 과정으로 보고 연구하는 과학’으로 정의한다. 이 같은 정의는 북한이 생각하는 역사학의 성격과 과제를 보여준다. 인류 역사발전은 마르크스가 제시한 법칙에 근거하며, 사회·역사 발전에서 가장 중요한 동력은 계급투쟁이라고 보는 역사적 유물론과 함께 역사를 ‘합법칙적 과학’으로 보려는 시각은 이 같은 정의에서 확인할 수 있다.
북한은 정권 수립 이전부터 역사학에 관심을 가졌는데, 이는 역사를 통해 인민대중을 교양함과 동시에 역사의 영향력을 정치적 현실에 연결하려는 의도에 기인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러한 성격 정의와 존재 형태, 역할은 북한이 취급하는 역사학의 성격이 남한의 그것과 다름을 보여주는 한 부분일 것이다. 즉, 북한의 역사학은 형식적 면에서 마르크시즘의 원리를 따름과 함께, 기능적 면에서 현실정치에 정당성을 부여하는 당의 도구라는 역할에 따라 역사 발전과정을 체계화함으로써, 혁명 건설을 구현하려는 의도적 노력의 과정이자 결과로 정의할 수 있다. 이러한 점에 집중한다면, 북한의 역사학은 학문의 기능을 상실한 존재로 보인다. 이는 1970년대 말부터 두드러진 역사학의 교조화와 함께 『력사과학』에 수록되는 논문의 질적 하락에서 드러나며, 이 같은 점은 부정할 수 없는 북한 역사학의 현주소로 보인다. 그러나 정치의 연속이라는 점에서 일정한 한계를 갖지만, 북한에서도 역사학 연구는 국가 차원의 주요 사업으로 취급되었기에 학술적 발전을 위한 노력 역시 존재했고, 여러 유의미한 학술적 성과가 도출된 것도 사실이다.
그렇다면 북한의 역사학 연구는 어떻게 전개되었는가? 이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우선 남북한 학술원과 과학원의 성립 과정을 논할 필요가 있다. 체제 차이로 인해 두 기관의 성격이 달라 보인다고 해도 출범 당시의 시대인식과 목표에서 학술원과 과학원은 공통분모를 가졌기 때문이다.
국가 차원의 학술연구기관 설치 논의는 1930년대부터 시작되었다. 국가적 학술연구기관 논의는 근대교육을 받고 활동 중인 지식인 계층이 어느 정도 축적된 상황에서, 당시 지식인들이 시대적 과제로 인식한 ‘민족해방과 독립 국가 건설에 대한 학술적 기여’의 필요성에 따라 백남운과 백낙준을 중심으로 거론된 중앙아카데미 창설 구상에서 출발했다. 물론 1930년대부터 강화된 일제의 사상단속과 학계를 향한 탄압이 강화되면서 중앙아카데미 논의는 구상 단계에 머물 수밖에 없었지만, 당시 구상에서 등장한 각 분야 지식인을 결집한 연구지도와 이를 통한 시대적 과제 달성, 일제의 관학 독점에 대항한 조선인 중심의 조선학 연구는 이후 남북한 학술원과 과학원 성립과정에서 적잖은 공통분모를 갖게 한 요소였다고 할 수 있다.
1945년 8월 16일, 일제의 패망 이후 과학기술 영역에서의 공백 문제 해소를 위한 건국준비위원회의 요청에 의해 조선학술원이 출범하게 되었다. 해방 초기, 과학·기술 영역에서의 기술 및 자재 보존과 인력 재배치에 초점을 맞춘 조선학술원은 학술연구와 국가건설에 기여할 방법을 모색하는 단체로 목표를 구체화했으며, 이는 1930년대 중앙아카데미 구상의 실현이었다. 그러나 과학기술 강조 세력과 사회과학 강조 세력 간의 갈등, 재정문제, 정치 노선을 둘러싼 인문·사회계 학자들 간의 위원장 선거 갈등으로 인해, 조선학술원은 해체되었고 냉전의 격화에 따라 국가적 학술기관 결성 논의는 남북한이 각각 학술원과 과학원을 만드는 것으로 귀결되었다. 비록 조선학술원 논의는 하나의 학술연구기관을 만들려 한 당초 목표에선 실패하였지만, 제국대학을 중심으로 하는 일제의 고등교육 경험이라는 공통분모를 가진 이들이 모여 제국의 근대적 지식으로 시대적 과제를 해결하려 한 시도이자 진보적 민주주의를 지향점으로 하여 결집한 경험이었다.
이후 국가에 기여할 학술적 방안을 모색하는 과정은 6.25 전쟁 중 남북한의 전시과학연구소와 전시경제학 아카데미야의 등장으로 이어졌다. 두 기관은 세부적 면에서 차이를 가졌으나, 기관 설치 이유에 있어 전쟁 극복과 승리를 향한 기여에 중점을 뒀다는 점에서 공통점 역시 보유했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북한은 1952년 종합과학원을 설치했으며, 남한은 동시기 제정된 문화보호법에 기반하여 1954년 대한민국 학술원을 설치하게 되었다. 두 기관은 각기 다른 체제하에서 등장했지만, 전후 복구를 위해 필요한 인재를 보호하고 학자들의 지적 능력을 국가적 차원에서 활용하기 위한 결속의 방안으로 등장했다. 세부적인 차이가 있다면, 대한민국 학술원은 정부기관이자 학자들의 특수 자율기관으로 운영됨과 동시에 예우형 학술기관과 연구형 학술기관을 절충한 형태라면, 북한 과학원은 전국적 학술연구를 기획하고 지휘 통솔하는 성격이 강력하며 연구자 양성까지 담당한다는 것에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북한의 역사학 연구는 어떤 과정을 거쳐 전개되었는가? 이 글에서는 선행연구에서의 단계적 구분법을10) 참고·절충하여 ‘기반 성립기(成立期)-체계 정립기(定立期)-완성 추구 시기-정체기’의 4단계로 정리하도록 하겠다.
제1기인 기반 성립기(1945~1952)는 북한이 역사학 연구를 위한 기초적 요소를 마련하는 시기였다. 본격적인 역사학 연구를 위해 필요한 기초시설과 물적 토대, 기초적인 연구자료, 준비된 간부와 훈련된 지식인의 절대적 부족은 당시 북한이 직면한 문제였다. 이에 북한은 종합대학 설립과 소련으로의 유학생 파견, 남한지역에서의 지식인 영입 시도를 통해 한반도 북부지역의 평양의학전문학교·평양공업전문학교와 같은 의학·공학 중심의 소수 전문학교로 대표되는 역사학 연구의 절대적 악조건을 해결하려 했다. 1947년 1월 7일, 북조선 임시인민위원회는 결정 제182호에 의거, 조선력사편찬위원회를 설치하여 역사 연구의 기본토대를 마련하고자 했다. 조선력사편찬위원회는 1948년 10월 2일, 내각결정 제11호에 따라 최근세사와 한국 통사(通史) 간행을 최우선 과제로 설정하고 4개 분과위원회(원시사·고대사·봉건사·최근세사)와 사료수집원, 정리원을 두고 연구를 시작했는데, 이 당시 특징은 사회주의의 이론적 토대를 세우던 당 사상사업이라는 현실적 요청과 맞물린 연구를 최우선 사업으로 취급했다는 점과 이론 수준 향상을 위해 소련 역사학을 참조하려 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 당 사상사업이라는 현실적 요청은 1940년대 후반에 간행된 『력사제문제』에 수록된 논문 다수가 사회경제적 구성·계급투쟁·민족해방투쟁·반(反)침략 전쟁에 관한 논문이었다는 점에서 확인할 수 있다. 또한 소련 역사학에 대한 정보 취득 시도는 북한의 역사적 유물론 수준 향상을 위한 과정의 일환이었는데, 이러한 노력은 『력사제문제』 「외국사조」에 수록된 소련학계의 사정 및 소련 역사학계의 논문, 1950년대에 간행된 『력사과학』 「번역」에서 확인할 수 있다.
제2기 체계 정립기(1952~1960년대 초반)는 국가 차원의 연구체계를 확립해 가는 과정이었다. 1952년 10월, 북한은 조선과학원을 창설했다. 이전의 조선력사편찬위원회가 진행하던 사업은 조선과학원 산하 력사연구소가 계승했고, 『력사과학』이 간행되기 시작한 것 역시 이 시기의 일이었다. 1964년 2월, 사회과학 연구기관 간의 유대 강화와 학술분과에서의 통일적 지도가 필요하다는 내각결정 제11호에 근거한 개편 끝에 현재의 조선사회과학원 체계가 탄생했다. 최종적으로 조선사회과학원 산하 력사연구소는 예하 5개 연구실(고대사·중세사·근대사·현대사·김일성 혁명역사) 체제를 확립하였고, 해당 체계하에서 역사 연구를 심화시키려 했다. 이 시기는 민족문화유산에 대한 자료수집과 고문헌 번역 및 복각이 적극적으로 이뤄진 시기였는데, 고전연구실에서 주관한 고문헌 번역 사업을 통해 1950~60년대 북한에서는 『반계수록』· 『담헌서』·『아방강역고』 등 조선 후기 실학자들의 저서와 『택리지』·『지봉유설』·『세종실록지리지』 등 지지류(地誌類)가 복각·번역되었다. 적상산(赤裳山) 사고본을 기초로 한 『조선왕조실록』 번역본인 『리조실록』 번역작업이 진행된 것 역시 이 시기의 일이었다. 또한 이 시기의 주요 연구성과로는 봉건제의 개념과 국가성립 문제에 관한 논쟁이 있었다. 봉건제와 국가성립에 관한 문제는 봉건제 결여론과 노예제 결여론을 비판한 백남운의 『조선사회경제사』, 『조선봉건사회경제사』에서 출발하여 소련에서의 제정 러시아 사회의 사회경제적 성격 논의와 유사하게, 삼국시대를 초기 봉건제 사회로 볼 것인지* 노예제 사회로 볼 것인지에** 대한 논쟁이었다. 이는 곧 삼국시대의 사회·경제적 성격을 비정(比定)한 과정이자 봉건제의 기원을 이해하
는 과정이었다.***
* 초기 봉건제 사회로 보는 주장은 김광진, 정찬영, 한용옥 등이 주장한 학설이다. 1953년부터 시작된 논의에서 이들은 독립적 거주와 개인 경리를 근거로 노비·하호(下戶)·부곡민을 농노로 해석할 수 있으며, 삼국시대를 동양 사회에 전반적으로 존재했던 예농형(隸農形) 특수 노예제에 근거한 봉건사회로 해석함이 타당하다고 주장하였다.
** 노예제 사회로 보는 주장은 도유호, 리응수, 백남운, 림건상 등이 주장한 학설이다. 도유호는 김광진 등이 주장한 초기 봉건제 사회론이 영세적 봉건 농업경영과 소규모 노예제적 농업경영을 구별하지 못했음을 비판하며, 노비·하호(下戶)·부곡민은 실상 노예와 다름없는 예속민이었기에 삼국시대를 노예제 사회로 봄이 타당하다고 주장했다.
*** 이러한 삼국시대 사회구성체 논의는 1960년대까지 논의가 진행되었으나, 양측의 첨예한 의견대립으로 인해 확정적인 결론을 도출하는 데에는 실패했다. 다만 해당 논의 이후 북한은 삼국시대를 초기 봉건제 사회로 잠정 합의하게 되었다
제3기 완성 추구 시기(1960년대 초반~1970년대 초반)는 이전까지 축적된 연구성과를 바탕으로, 한국사 전 시대에 걸친 연구가 이뤄진 시대였다. 물론 중-소 결렬의 반작용으로서 일어난 1956년 4월 조선로동당 3차 당대회를 통한 체제 단속 및 숙청 등 정치적 요소에 의한 제약 역시 존재하였으나, 이 당시 북한은 한반도 통사 연구에 있어 유의미한 연구 결과를 여럿 내놓았다. 고고학·고대사 영역에서 북한은 유적 발굴 및 연구를 통해 한국에 독자적인 청동기가 존재했음을 입증하였으며, 중국 문헌상의 단편적 기록 추적과 사료 비판을 통해 고조선의 경계에 관한 가설을 제시하였다. 또한 김석형의 「초기 조-일 관계 연구」, 「삼한·삼국의 일본열도 내 분국에 대하여」와 같은 고대 한일관계사 연구와 임나일본부설 비판 역시 이 당시 연구의 산물 중 하나였다. 이 당시 북한이 보였던 획기적 성과는 고려·조선시대 사회·경제사 연구와 조선 후기 사회·경제적 변화 양상 연구였다. 삼국시대 사회경제구성체 논의의 연장선이었던 고려·조선시대 사회·경제사 연구는 토지제도를 중심으로 이론을 전개했는데, 대표적으로 토호(土豪)·국가·촌락민 간의 지배관계를 설명하려 한 림건상의 「조선의 부곡제에 관한 연구」(1963)와 박시형의 『조선토지제도사』(상권 1960, 하권 1961)가 이 시기를 주제로 한 연구였다. 물론 도식적 해석과 애국주의 강조의 산물이라는 비판이 없진 않았으나, 이 같은 연구를 통해 조선 후기의 사회·경제적 양상을 드러내려 노력한 점 역시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끝으로, 제4기 정체기(1970년대 중반~)는 현재의 북한 학계의 모습으로도 대표되는, 이전과 비교해 많은 부분에서 퇴보되었다고 평가받는 시기이다. 중-소 결렬과 문화대혁명으로 불안해진 대외적 입장, 1960년대 중반부터 문제시된 사회주의 경제체제의 한계 등 내외부적 불안 타개책으로 북한이 제시한 사상 무장 방침은 1974년 등장한 주체사상과 당의 유일사상 체계를 역사 연구에 전면화하였다. 물론 이전에도 역사 연구가 정치로부터 완전한 독립을 보장받은 것은 아니었고 체제 단속 과정에서 바뀐 역사적 평가 역시 존재했으나, 이 시기부터 학계 연구는 변증법적 유물론을 기초로 한 공격적 민족주의와 민족지상주의, 김일성 일가 중심의 극단적 개인숭배 성향을 띠기 시작했다. 이러한 기조는 1980년대 동유럽 사회주의권 붕괴에 의한 위기의식 하에 더 강화되어, 주체사상의 이름을 빌린 사회주의 생명체론의 영향 아래**** 조선 민족 제일주의·우리식 사회주의 주창과 민족주의 강조, 2000년부터 시작된 ‘김일성 민족론’ 제창으로까지 이어졌다. 1990~2000년대 단군릉을 둘러싼 발굴 및 복원 과정은 이러한 모순의 누적이 고대사 연구에까지 영향을 미친 사례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이 시기부터 북한의 역사 연구는 남한 학계에서도 알려진 바와 같이 자율성 강조 과정에서 진행된 외부와의 교류·외부 문물 수용의 부정적 취급,***** 외부 세력에 대한 ‘인민대중의 영웅적 투쟁’ 강조 과정에서 발현된 부조적(浮彫的) 역사해석, 당대의 시대적 제약을 결함으로 정의하는 경향, 외국 세력과 국내 지배계급 묘사에 대한 선동적 용어와 적개심을 유도하는 용어 사용을 대표적인 문제점으로 드러내고 있다.
**** 이는 12세기 영국 스콜라 철학자 솔즈베리의 존(John of Salisbury)이 주장한 유기체설과 유사한 이론으로, 그 골자는 ‘수령은 뇌, 당은 심장, 인민대중은 세포’로 요약된다.
***** 이를 보여주는 예는 단혈성(單血性) 주민집단으로서의 ‘조선 사람’ 기원에 집착한 사례를 들 수 있다. 외부와의 교류와 개입의 여지를 차단하는 과정에서 북한은 한반도에서의 최초 거주민의 성격을 정의하며 ‘조선 옛 유형의 사람들의 핏줄을 이어받아, 조선 본토에서 기원한 주민이 원시사회 문화를 창조했다’고 규정한 바 있다.
(계속)
[어쩌다가 북한을 본다] 조선인민군 공군 조종사_1 (0) | 2024.06.27 |
---|---|
남북한 역사학의 일제강점기 노농(勞農)운동 연구 검토-1920~1930년대 노농운동 연구 비교를 중심으로- (3) (0) | 2024.05.09 |
남북한 역사학의 일제강점기 노농(勞農)운동 연구 검토-1920~1930년대 노농운동 연구 비교를 중심으로- (2) (0) | 2024.05.09 |
[어쩌다가 북한을 본다] 호위사령부_2 (1) | 2024.02.24 |
[어쩌다가 북한을 본다] 호위사령부_1 (0) | 2024.02.2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