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 컨텐츠

본문 제목

[어쩌다가 북한을 본다] 조선인민군 공군 조종사_1

역사

by HUMAN H 2024. 6. 27. 03:13

본문

● 이 글은 작성에 있어 다음의 자료를 참조했다.

-국가안전기획부 주관 이철수 기자회견

-이철수 대령 개인방송 내용

-KBS 뉴스, 대한뉴스 등

-이웅평, 『기수를 삶으로 돌려라』, 서울:도서출판 한울, 2000.

-https://monthly.chosun.com/client/news/viw.asp?nNewsNumb=200707100026 (검색일자: 20240604) 등

 

 

 

1. 들어가며

 

 필자는 공군 예비역이다. 공군에서 현역복무를 한 이유는 물론 처우가 더 나아서도 있었지만, 공군에 관심이 가서이기도 했다. 한때는 어린 나이의 치기로 조종사가 되고 싶었지만, 그럴만한 머리와 신체조건이 안 되었기에 포기했다. 그래도 어떻게 보면 그 관심이 아직 완전히 식지는 않았기에 업이라 여기는 역사학의 관점에서 이번 글을 쓰는게 아닐까 싶다. 아무튼 그 당시 근무하다가 순간 궁금증이 생겼다. 필자가 복무할 당시까지 (현재로서) 최후의 귀순 조종사인 이철수 대령이 현지임관 형식으로 소령이 임관해 한국에서 군생활을 한다는 것은 알고 있었는데, 현재도 근무 중인가가 궁금했던 것이다. 그래서 인트라넷 인명 검색 엔진을 돌려봤다. 놀랍게도 있었다. 당시 이 대령은 공군항공정보단 북한공군전술분석TF실장으로 보직이 입력돼있는 것을 봤는데, 그때 처음 든 생각은 세월의 힘 앞에서 그도 어쩔 수 없었는가 싶었던 것이었다. 아무래도 민간에 공개된 그의 사진은 귀순 직후~현지임관한 시절의 젊은 이철수였기에 그랬을지도 모른다. 내가 확인했을 당시 인트라넷 사진에서의 이철수는 북한 사람들이 신체적으로 부담을 많이 받아서인지 모를 특유의 투박함이 더해진, 나이를 먹으면서 일어난 노화의 모습이 역력한 모습이었다.

제대한 이후 다시 일상으로 복귀해 살아가던 도중, 유튜브에서 다시 그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제대하고 1년인가 2년 뒤였는데 그는 대령으로 예편해 북한에서의 생활과 귀순 당시의 일을 영상으로 찍었는데, 알고리즘에 의해 그걸 보게 된 것이다. 최근에는 이 대령이 회고록을 쓰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아마 이웅평과 비슷하게 기수를 삶으로 돌려라같은 식으로 쓰이지 않을까 싶다. 이번 글에서는 북한 공군과 공군 조종사들에 대해 다뤄볼까 한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이철수의 모습. 사실 필자도 주로 본 것이 이때의 모습이다 보니 인트라넷에 검색했을 당시는 변한 모습에 좀 놀라긴 했다.

 

 

2. 조선인민군 공군의 연혁

 

 일단 이번 주제를 다루기 위해서는 북한 공군의 특성과 연혁을 보아야 할 것이다. 북한 공군의 정식 명칭은 조선인민군 공군으로, 현재 사령관은 김광혁 대장, 공군사령부 정치위원은 엄주호 중장이 담당하고 있다. 그리고 동시에 대한민국 공군의 적 중 하나인 동시에 사실상 1차 적수이기도 한 존재라 할 수 있다.

 

 북한 공군의 모체는 1946년 발족한 신의주항공협회이다. 북한 공군 역시 자신의 출발점을 이 단체에서 잡는다. 훗날 공군의 주요 창설 멤버가 되는 리활을 포함한 일본군 항공병 출신 인사들이 만든 이 비행클럽이 김일성의 지원을 받으면서 조선인민군 공군의 역사가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당시 남북한 양측이 그러했듯 공군 창설에 있어 일본군에서 항공 기술을 익힌 자들을 끌어들여 인적 골간을 조직했고,(*) 분단이 가시화되는 상황 속에서 소련의 공군 장비와 시스템을 도입하며 공군 조직에 박차를 가하기 시작했다. 194928, 북한이 정권 수립 이전부터 군을 창설하면서 공군 역시 정규 군 조직으로 탄생했고, 이때 북한 공군은 사단급 전력으로 증강되어 항공사단을 편성하기에 이른다. 이 당시 조직된 제1 항공사단은 예하에 제1 추격기련대를 두었는데, 이 추격기련대는 6.25 전쟁을 거치면서 근위부대가 된다. (**)

 

* : 기분나쁘게 들릴 수 있지만 이건 민족주의와는 별개로 기술적, 현실적 문제였다. 이 당시 남북한 가릴 것 없이 지식이나 기술의 면에서 가장 근대화 정도가 높은 일본을 모델로 삼을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아무리 민족주의적으로 일본을 거부하고 싶다고 해도, 현실적으로 기술이나 지식을 배워오는 창구가 사실상 일본이 전부였던 시절이었고, 독립한 직후의 식민지 출신 국가가 선택할 수 있는 물적 토대는 식민통치에 의해 매우 제한되었기에 그런 선택이 최선이 된 것이다. 이 당시에는 주로 일본 육군 소년비행병 시스템이나 특별조종후보생(특조) 시스템을 통해 항공기술을 익힌 자들이 남북한 공군의 창설 과정에 다수 개입되었다. 해군 출신들도 있기는 했지만, 일본 해군의 순혈주의 분위기 때문에 조선인 출신 해군항공대 요원은 수가 많지 않아 수적으로는 육군항공대 출신이 다수였다. 독립군 출신들도 매한가지였다. 이들도 일부는 공군 건설 과정에 개입했지만, 그 수가 일본 육항대 출신들에 비해 너무 적었다.

 

** : 북한 공군은 소련식 공군 편제를 받아들였는데, 소련 공군은 육군과 동일한 부대 편제를 사용했다. 그래서 중대-대대-전대-비행단 편제를 쓰는 한국 공군과는 달리, 중대-대대-련대(연대)-사단 편제를 사용한다. 추격기는 전투기를 의미한다.

 

 

1) 1950년대 북한 공군

 6.25 전쟁 직전 북한은 전술한 제1 추격기련대를 제56 추격기련대로 재편했다. 이 부대는 전쟁 발발 당시까지 북한군의 유일한 공군사단 관할 추격기련대였고, 전쟁이 발발하자 소련제 Yak 전투기로 무장해 남침에서 제공권 장악을 담당했다. 북한은 이 부대가 전쟁 개시 1달만에 미군 항공기 45대를 격추했으며, 여기에는 B-29 폭격기도 11대 포함된다고 선전하지만, 사실 적 항공기 진로 방해나 손상도 격추로 산정해버리는 등 전과조작이 심각했기에 이 전과는 선전을 위해 조작한 전과로 의심된다. 하지만 미 공군의 전력을 하늘의 요새라 뽐내며 날아든 미제의 공중비적들이라고 신나게 까면서 추격기련대가 이들을 추풍낙엽으로 만들었다고 선전한다 한들 당장 세계대전에서 승전의 일익을 담당한 미 공군을 이제 막 조직된 군대가 격멸한다는 것은 말이 안 되는 것이었고, 56 추격기련대는 전쟁이 발발한 지 1년이 채 못되어서 전력의 20%만이 남을 정도로 궤멸 상태에 이르게 된다. 여하튼 전쟁 초기의 전과로 56 추격기련대는 근위 제56 김지상 영웅 추격기련대칭호를 얻으면서 근위대가 되었다.

 사실 김일성은 빨치산 출신이었던 만큼, 공군력의 힘을 잘 인식하지는 못했지만, 미군의 공군력에 의해 북한 공군이 일소당하는 한편 미군의 폭격으로 죽을뻔한 고비를 여러 번 겪으면서 공군력의 힘을 깨닫고 본격적으로 공군력 강화에 박차를 가하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김일성은 지속적으로 비행사 양성을 요구하면서, 소련과 중국에 비행사 후보 2천여 명을 보내 위탁교육을 실시하도록 했다. 이러한 결과에 의해, 1951년 북한 공군은 병력 2, MiG-15를 중심으로 하는 소련제 항공기 180여 대로 무장한 제1 전투비행사단, 2 전투비행사단, 11 혼성항공사단, 습격기(폭격기) 사단을 갖게 되었다. 1953년에 이르러서 북한은 병력 1, 항공기 490여대로 구성된 4개 비행사단과 2개 비행련대를 보유한 조직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2) 1960년대 북한 공군

 이 당시의 특기할 점이 있다면 베트남 전쟁에 대한 공군 조종사 파병이 있다. 베트남 전쟁 당시 북한은 국제공산주의 운동과 사회주의 진영 지원을 명분으로 하여 북한군을 월맹 측에 파병했다. 물론 실제 목적은 따로 있었다. 베트남에 미국의 신경이 쓰이게 된다면 상대적으로 미국은 한국에 신경을 덜 쓰게 될 것이고, 이러한 상황을 틈타 적화통일을 달성할 수 있을 것이라는 계산이 바로 김일성의 본 목적이었다. 1960년대 중반 김일성은 비동맹운동의 지도자를 자처하며 반제반미(反帝反美) 전략의 일환으로 미제와 각()을 뜨자!’는 구호를 외쳤는데, 그것이 남한에 대해서는 무장간첩 남파를 포함한 각종 도발로 발현된 것이었고 국제적으로는 베트남 전쟁 파병으로 발현된 것이었다.

 베트남 전쟁 당시 북한은 2개 전투비행 중대를 시작으로 하여 200명의 전투조종사들을 순환배치 형식으로 파병했고, 개인화기를 포함한 장비, 정보부대 및 기타 특수부대를 파병했다. 이들은 ‘Z이라는 이름으로 파병되었는데, 그동안 그 존재가 알려지지 않다가 최근 들어서 세상에 어렴풋이 존재가 알려지게 되었다. 당시 Z단이 북베트남에 파견된 소련군 군사고문단이나 지대공 미사일 운용 요원들과는 달리 북베트남군과의 사진을 찍는 것을 일체 거부한데다, 전투 결과에 관한 정보 교환도 거부했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북베트남 측은 북한 파병부대가 자국 부대와 정보 교환도 일절 안 하면서 전과는 확대하고 손실은 은폐하려 든다며 불만을 토로하기도 했다. 한편으로 당시 북한은 베트남 전쟁의 장기화 속에서 북베트남과 미국이 협상하는 것을 두고 ‘북베트남이 사회주의 운동을 배신한다’며 비난했고, 북베트남은 그들대로 ‘자신들의 전쟁인데 왜 우리와 협조도 제대로 안 하면서 남의 나라에 감 놔라 대추 놔라 거리냐’고 불만이 쌓이던 차였다. 결국 이로 인해 북베트남은 전쟁 이후 북한에 넘겨주기로 한 미국제 노획 장비를 제대로 안 넘겨주는 것으로 보복했고, 중국과 긴밀한가 소련과 긴밀한가의 여부를 놓고서 노선 차이까지 추가되면서 북한-베트남 관계는 냉각되는 것으로 결론이 났다.

 한편 1969년 북한 공군은 미국을 상대로 도발을 자행했는데, 미군의 전략정찰기 EC-121을 격추한 사건이 그것이었다. 이때 격추를 실행한 장본인이었던 제1 항공사단은 성공적으로도발에 성공한 대가로 근위대 칭호를 받게 되었다.

 

 

 

3) 1970년대 북한 공군

 이 시기는 2차 대규모 전력 증강 시기였다고 할 수 있다. 1969년 김일성의 ‘비행기 1대당 조종사가 2~3명이 되도록 인원을 확충하고, 조종사 1명당 2~3배의 역량을 발휘할 수 있게 하라’는 교시가 하달됨에 따라, 북한 공군은 대규모 전력 증강을 시도한다. 이때 북한 공군은 새로 부대를 창설하는 한편 비행사의 수를 늘리면서 비행사 개개인의 역량을 강화하려 했다. 이 시기 이뤄진 조치 중 하나가 바로 제5 비행사단의 조직, 이를 통한 An-2 조종사를 포함한 경폭격기 역량 확충이었다. 각 지역에 김책공군대학과 별개로 비행군관학교를 설치하기 시작한 것도 이때의 일이었다.

 

4) 1980~90년대 북한 공군

 세계적으로 냉전 체제가 해체되면서 북한은 이를 두고 세계적으로 유행하는 군의 비정치화, 비사상화에 맞서 견결히 투쟁해야 한다고 외치며 공군의 편제 개편을 단행했다. 이에 따라 이전까지는 전투기, 폭격기, 공격용 헬기 등을 각각 별개의 비행사단/려단으로 편성해 부대를 구성했지만, 이때부터는 각 비행사단이 독립적으로 작전을 수행할 수 있게끔 연대별로 기종을 나눠 사단 안에서 연대를 섞는 형태로 공군 편제를 개편했다. 이를 통해 기존의 8개 비행사단이 4개 비행사단으로 통폐합되었다. 또한 이러한 편제에 맞게끔 전략전술 역시 공군의 독자적 전투역량 강화를 위해 공군사령부에 이전보다 더 폭넓은 작전권을 부여했다.

 물론 이런다고 해서 북한 공군이 전략 공군이 됐는가는 별개이다. 한국 공군의 문제점 중 하나가 당장 전쟁 가능성이 가장 높은 북한군을 상대하는 데에 주력하면서 전술공군에 역할이 제한된다고 지적이 이뤄지는데, 북한 공군은 이보다 더 심각하다. 근본적으로 소련 공군이 채택한 지상 레이다 기지의 경보·관제에 의존하는 시스템을 안 바꾸고 그대로 쓰고 있기 때문이다.

 

5) 2000년대 이후

 ‘고난의 행군이라 명명되는 경제난을 겪으면서 북한 공군은 사실상 전력이 붕괴되는 수준에 이르고 말았다. 물론 전력 그 이전에 당장 생활에서의 문제부터가 해결이 안 되는 지경에 이르렀다는 것도 전력 붕괴 그 이상으로 심각한 문제였지만 말이다. 여하튼 그 나라의 자본 동원 능력과 기술적 능력에 의해 전력이 결정된다는 특성이 강력한 해군과 공군은 고난의 행군 시기를 거치면서 전력이 붕괴됐고, 지금까지도 그 여파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하는 상황이다. 이 때문에 전투기로 대표되는 대칭전력으로써의 공군력만으로는 판도를 더 이상 뒤집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은 북한은 비대칭 전력을 중심으로 하여 공군 전력의 중심을 변경하기에 이르렀다. 이에 따라 공군은 전략군(구 전략로케트군)과 함께 방공미사일과 방공전력 다수도 함께 운용하기 시작했고, 지대공 미사일로 대표되는 반항공전력(방공전력)에 대한 통제권을 강화했다.

 한편, 2000년대 이후 북한 공군의 전술에 영향을 미친 것이 있다면 걸프전쟁과 이라크 전쟁을 들 수 있다. 당시 미 공군의 공중전력과 함께 벙커버스터나 공대지 미사일의 위력을 본 북한은 이때부터 집중적으로 군사시설물에 대한 시공을 바꿨다. 은폐호와 격납고의 벽을 더 두껍게 만들고 상판 철근 콘크리트 역시 더 두껍게 만들어 설치하기 시작했으며, 인공위성이나 정찰기를 기만하기 위해 위장시설을 세우거나 가짜 비행기 모형을 만들어 세우기 시작한 것이 이때부터의 일이었다. 토굴 형태의 갱도형 격납고를 본격적으로 건설한 것도 이 시기의 일이었다. 다만 이러한 갱도형 격납고를 만든 결과, 습기 관리에 문제가 생겨서 기자재 손실이 늘고 관리 문제가 더 복잡해졌다는 것이 문제로 지적된다. 사실 환풍 시설을 가동하면 문제가 조금은 덜해지겠지만, 본질적으로 문제 해결이 되는 것이 아닌데다 북한 전체가 전력난을 겪다 보니 그나마 설치해 놓은 환풍 시설도 제대로 가동 못 하는 것이 문제이다.

 거기다 80년대부터 강조하기 시작한 수령을 위한 성새, 방패, 총폭탄이 되자’는 슬로건이 더 노골적으로 변한 것도 주목할 만한 부분이다. 사실 수령결사옹위를 내세우며 자폭관을 집어넣는 게 하루 이틀의 일이 아니기는 했다. 그 이전에도 ‘수령결사옹위의 정신! 90년대 리수복, 길영조  자폭 영웅이 되자!’같은 포스터 구호가 있긴 했었으니 말이다. 문제는 2020년 들어 이런 걸 더 노골적으로 교육하고 강조하는 등 정말 막나가는 상황이 되었다는 것이다. 20231130, 항공절을 즈음하여 공군사령부를 방문한 김정은은 “닭알에도 사상을 재우면 바위를 깰 수 있다는 것이 우리 당의 힘에 대한 논리이고 정의이며 철학이다. 싸움의 승패 여부는 무장 장비의 전투적 제원에 따라 규정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사상을 가지고 무엇을 위해 싸우는가 하는 데 달려 있으며, 아무리 기술적 우세를 자랑하는 적들이라 해도 우리 비행사들의 정치사상적 우월성을 압도할 수는 없다”고 연설했다고 조선중앙통신이 보도했다. 사실 전형적인 사이비 관념론에 입각한 헛소리이긴 한데, 이걸 대놓고 말한다는 것 자체가 이미 어떻게 해볼 수 없다는 것을 본인들도 인정한 것이 아닌가라는 분석도 있다.

 

북한이 공개한 영상에서 확인할 수 있는 비행장 내 포스터이다. 이제는 그냥 대놓고 조종사들한테 카미카제하라고 요구하는 것이다.

 

2023년 11월 30일 김정은이 공군사령부를 방문했을 당시 조선중앙방송이 공개한 사진이다. 김정은의 왼쪽이 김광혁 대장(공군사령관), 오른쪽이 엄주호 중장(공군사령부 정치위원)이다.

 

 

-북한 공군의 편제와 기본 전략

 

 북한 공군은 과거 사회주의권에서 주로 채택한 통합군 체제에 근거해 조선인민군 총참모부 예하 공군사령부 형태로 존재한다.(***) 공군사령부는 평양시 중화군, 전시 지휘소는 강원도 원산에 위치해 있으며 예하 부대로 5개 비행사단, 1개 훈련비행사단, 직승기려단(헬리콥터 여단), 3개 전술수송려단, 2개 공군저격려단, 지상방공부대 다수, 기타 부대를 두고 있다. 편제상 1개 비행사단은 8개 비행련대와 기타 련대로 구성되며, 1개 비행련대는 4개 비행대대와 기타 중대, 소대로 구성된다. 한편 각 비행사단 사령부는 다음의 지역에 주둔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1비행사단: 평안북도 개천비행장

(북한 공군이 내세우는 정예 비행사단이다)

-2비행사단: 함경남도 덕산비행장

(여기는 반대급부로 전투기 추락 등 각종 사건사고 발생률이 높아서 군관, 비행사들이 꺼리는 부대이다. 하도 사건사고가 많아 지휘책임을 물어 비행사단장이 중도에 교체될 정도면 더 말이 필요없을 것이다.)

-3비행사단: 황해북도 황주비행장

-4비행사단: 함경북도 어랑비행장

(함경북도 유일의 민군 겸용 비행장인 곳이다)

 

 (사실상 남한을 대상으로 짠 전술이지만) 북한 공군이 유사시 취할 전략은 개전 초 가용전력의 사실상 전부를 최단 시간 내에 주요 대도시, 비행장, 지대공 미사일 사이트, 지휘소 등 주요 시설과 지대로 침투시켜 기능 마비나 혼란을 유도하는 것을 주로 한다. 이를 위해 각 련대, 대대, 편대별로 타격 목표와 임무를 부여해 전쟁이 발생하면 정해진 목표로 몰려가 타격하는 식으로 전술을 짰다고 이철수가 증언한 바 있다. 이런 전략 특성 때문에 전국 각지에 비행장을 분산배치하되 종심 타격·제공권 확보를 담당하는 중요 비행단을 후방에 배치한 남한 공군과 달리, 북한은 황해도와 강원도 인근, 더 정확히는 북위 39도선 밑을 중심으로 전체 비행장·전투 비행 부대의 7~80%가 집중되어 있다. 여기서 예외가 되는 주요 비행장이 있다면 신의주 비행장 정도가 있다. (과거 한국 공군이 F-4 팬텀을 도입하려고 한 이유가 이 점 때문이었다. 북한이 6.25 전쟁 당시 미군의 폭격에 당한 경험을 반영해 비행장을 전국에 분산배치하는 동시에 전쟁 준비를 한다고 주요 부대를 39도선 밑에 몰아넣긴 했지만, 유사시 정예전력을 신의주 비행장에 보존해놓고 있다가 전력 소모를 강요한 뒤 정예전력을 침투시켜 전세를 뒤집는 수를 쓸 수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 점 때문에 신의주 비행장까지 항속거리를 확보하면서 지상공격능력도 뛰어난 항공기로 팬텀이 지목되었고, 한국은 베트남 전쟁 참전을 명분으로 하여 팬텀 도입을 성사시켰다.)

 물론 이 전략의 최대 문제점이 있다면, 시간을 끌면 절대적으로 불리해진다는 것을 6.25 전쟁으로 깨달은 북한이 단기결전에 입각한 속도전을 추구하려 했다는 것이다. 주식에 비유하면 속된 말로 몰빵해서 단타로 쇼부친다인데, 사실 단기결전에 의한 속도전이 성공하는 경우는 소규모 국지전에서라면 몰라도 역사적으로 대규모 전쟁에서 성공한 바가 거의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 전술이 아무 쓸모도 없는 전술은 아니다. 한번에 전력을 몰아넣어 공격한다는 것은, 방어자의 입장에서 이 전술은 당장의 전투 현장에서 수적 우위를 점하려는 전술이고 개전 초반부터 이렇게 수적으로 밀어붙이는 전술은 경우에 따라서 굉장히 위협적인 전술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거기다 1980년대까지 한국 공군의 전력이 지금처럼 북한 공군을 72시간 안에 정리할 만큼 우위를 점하는 것도 아니었기에, 1980년대까지 북한 공군의 이러한 전술은 남한에 있어 굉장한 위협으로 다가왔던 시절도 있었다. 이 점은 당시 차기 전투기 사업을 통해 F-16을 도입한 원인이자 배경이기도 하다.

 

*** : 통합군 시스템은 육··공 군종이 분리되어 있긴 하나, 사실상 육군 출신의 총참모장이 해군과 공군 위에 존재하는 성격이 강한 것이 특징이다. 한국이나 대부분의 서방권 국가는 합동군 체제에 근거해 군을 구성한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듯이 육··공군 참모총장을 두고 그 위에 합동참모본부를 설치한 것이 그 형태이다.

 

 

 

3. 공군 조종사 선발과 교육

 공군하면 흔히 떠올리는 것은 조종사들의 이미지이다. 그도 그럴 것이 공군의 대표적인 전투 특기가 조종과 방공이고, 애초 공군의 존재 이유가 제공권 확보이니 그럴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북한은 공군 조종사를 어떻게 선발할까?

 

 한국은 조종사가 되길 원하는 자들이 지원하면 각 기관이 심사를 거쳐 사관학교, 학군단, 학사장교 루트로 교육을 받고 임관하는 시스템이지만, 북한의 조종사 선발 방식은 징병제와 유사하게 돌아간다. 보통 북한군은 병력 자원 대상이 고등중학교 4학년(고등중학교 졸업 1년 전)이 될 즈음에 징집을 실시한다. 보통 빨리 뽑혀가는 순서대로 처우가 좋은 부대나 군종으로 가는 식이다. (사실 임무 특성상 대우가 달라지는 것은 불가피한 점이지만, 북한군은 그런 수준을 넘어서 소속 군종의 종류에 따라 기본적인 생활보장 여건이나 처우가 달라지는 기형적인 구조라는 것을 유념해야 한다.) 보통 공군 조종사 후보자들은 호위부대와 특수부대 입영자를 다 뽑고 나면 해군, 전략군 입영자와 함께 뽑는 식이다.

 일단 현대전에서 조종사에게 요구하는 능력이 많기에, 조종사 지원자들은 1차적으로 출신성분 및 당성(黨性, 당에 대한 충실성) 검토, 지식수준 측정 검사와 신체검사를 거친다. 시험은 총 6개 과목을 응시해, 모든 과목에서 100점 만점 기준 45점을 넘기면 합격하게 된다. 시험과목은 혁명력사(이름은 거창하지만 실은 김씨 일가의 위대함을 선전하는 과목이라고 보면 됨), 국어, 수학, 물리, 화학, 외국어(영어와 러시아어)가 있다. 영어는 미국과 싸워야 한다는 이유에서 능력을 확인하는 것이고, 러시아어는 1990년대까지 북한에서 제1외국어이기도 했거니와 주력 항공기가 모두 소련제라서 교범과 계기판, 조작 스위치 문구 등을 읽을 줄 알아야 하기에 확인하는 것이다. 출신성분을 따지는 이유는 기본적으로 북한에서 명망 있고 중요한 직업을 맡으려면 출신성분과 당성을 검토해 그 성분이 깨끗해야만 하는 동시에 조종사 자체가 국가의 주요 전력이라는 이유에서이다.

 

 이렇게 1차로 합격한 입영 대상자들은 함경북도 청진시 경성군에 위치한 김책공군대학(현 명칭 김책명칭공군대학) 또는 비행군관학교 초모생(招募生)이 되어, 초모소에 집결해 일반 전투복을 지급받고 대기하다가 인솔나온 군관과 하전사를 따라 열차를 타고 공군대학으로 입소하게 된다.(****)

 

**** : 공군대학의 경우는 5년제, 비행군관학교는 4년제 교육과정이며, 비행군관학교는 공군대학과 달리 순수하게 조종사와 항법사만을 양성하는 교육기관이다. 대한민국 공군에 비유하면 조종 특기만 선발해 교육하는 곳이라고 보면 된다. 김책공군대학은 함경북도 청진시 경성군에 위치하며, 조선인민군 공군의 모태인 신의주항공대 교육부에서 출발한다. 평양학원에서 신의주항공대의 교육 기능이 분리되면서 1956년 개교한 것이 김책공군대학이었다. 다만 1990년대 즈음 김책공군대학은 차광수비행군관학교로 명칭을 잠깐 바꿨는데, 후에 김책공군대학으로 환원되었고 이철수가 교육을 받았던 경성비행군관학교(김책공군대학과는 별개 시설)는 김책공군대학으로 흡수되었다.

 차광수라는 이름을 붙인 이유는 김정일을 위해 자폭 정신으로 무장하고 차광수를 본받아야 한다는 이유에서였다. 차광수(1905~1932)는 대성산혁명렬사릉에 안장된 인물로 북한은 그를 조선혁명군 및 조선인민혁명군 지휘관이자 김일성과 함께 항일무장투쟁에 참여한 젊은 공산주의 투사라고 선전한다. 차광수의 본명은 차응선으로, 일본에서 고학을 하며 사회주의 사상을 학습했고, 귀국 후 만주 길림성에 정착해 살다가 중국 내 조선인 청년단체 동만청총의 간부를 지낸 인물이다. 북한이 선전하는 바에 따르면 차광수는 빨치산 활동을 하며 일본군과의 전투 과정에서 포위당했을 때 포로로 잡히지 않기 위해 수류탄으로 자폭했다고 하는데, 실제로는 1930년대 중국 항일무장단체 간의 파벌 싸움 과정에서 벌어진 총격전에 의해 다소 어이없이 삶을 마감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공군대학에 도착하면 전염병 확산 방지 차원에서 다시 신체검사를 실시한다. 주로 비행기 멀미가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 돌아가는 원판 위에서 버틸 수 있는가, 시력은 1.5 이상인가 등을 측정하며 항공의학연구소의 면접과 관상, 손금까지 다 보고 비행사로 키울 자원을 선발하게 된다. 이철수의 증언에 따르면, 자신이 비행군관학교에 입교할 당시 사상의학에 입각해 전투비행사들은 소양인·소음인만 선발하고, 태양인·태음인은 항법사와 조종사로 분류했다고 한다. 역대 항공사고를 분석한 결과 사고 비율이 가장 높았던 인원이 태양인·태음인이었던 점에서 그랬다고 그는 증언했다. 물론 지원자가 많으면 어떤 기준을 세워서라도 최대한 거를만큼 거르는 것은 당연하지만 유물론을 내세운다는 집단이 사상의학에 근거해 기준을 세웠다는 것은 다소 안 믿길 수도 있다. 하지만 중요한 사실이 있다. 정체(政體)로 볼 때, 이 북한이라는 국가 자체가 정상적인 사회주의 국가에서는 배격할 관념론, 인간의지론에 쩔어있는 곳이 한두 군데가 아니라는 점 말이다. 이건 필자의 추측인데, 아마도 1990년대 서양의학에 기반한 의료 시스템이 붕괴되면서 김정일의 ‘동의학(한의학)을 중시해야겠다’는 말이 교시로 내려오면서 이런 기준이 세워진 게 아닐까 싶다.(*****)

 

***** : 북한은 한의학을 동의학(東醫學)이라 부른다. 이런 명명은 허준의 동의보감서문에 등장하는 중국에 남의(南醫)와 북의(北醫)가 있다면, 조선에는 동의가 있다는 표현을 따와 만든 것이다. 물론 당시 사회 기반이 다 무너진 마당에 나라를 다 망쳐먹은 지도자라는 놈이 저런 소리를 한 걸 보면, 그야말로 이익이 성호사설에서 말한 것과 같은 ‘정신을 잃을 때까지 술을 마시고 고기로 배를 채우는 자들이 양으로 밭을 갈면 되고 쌀을 심으면 쌀이 난다는 소리를 하니 모두 귀신 도깨비 같은 놈들이다’와 비슷한 소리로밖에 안 들릴 것이라 필자는 생각한다.

  여기서 비행사와 조종사라는 표현이 나와서 동어반복이 아닌가 생각할 수 있지만, 북한 공군을 기준으로 하면 둘은 엄연히 다르다. 비행사는 전투기나 공격기 등 단독으로 조종하는 기체를 운용하는 요원을 칭하는 것이고, 조종사는 폭격기, 수송기 등 2인 이상 탑승해 조종하는 항공기를 운용하는 요원을 칭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임관 이후 받는 군관증에서도 비행사와 조종사는 명칭을 구분해 발급한다.

 

 

 일단 이렇게 신체검사를 통과하면 추격기(전투기) 비행사 대대와 직승기-폭격기 비행사 대대로 구분해 훈련을 시작하며, 1년간의 교육을 거친 뒤에는 비행사, 항법사, 조종사로 직렬을 구분하게 된다.

 모든 군대가 그렇듯이 기초군사훈련의 시작은 제식이다. 입교하고 1~2달 동안은 제식훈련만 진행한다. 문제가 있다면 북한군의 제식은 우리가 다 알다시피 열병식에서 볼 수 있는 그것과 상당히 유사하다는 것이다. 단지 일반 제식은 열병식에서의 제식보다 팔다리를 뻗으며 올리는 정도가 조금 덜하다는 것이 차이일 뿐이다. 팔을 가슴 높이까지 들어올리면서 휘젓는 동시에 콘크리트 바닥 위에서 다리를 뻗으면서 들어올려 걷는 동작을 계속 하는데 몸에 무리가 안 오면 그게 더 이상할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몸에 무리가 와 자주 입실하게 된다면 그 역시 탈락 사유가 된다는 것 때문에 버틸 뿐이다. 보통 비행사 후보군에서 떨어지게 되면 교육 이수 정도에 따라 공군 하전사(병사)나 공군 일반특기 군관으로 가게 된다. 다만 덜 억울한(?) 것이 있다면, 이들이 1차적으로 출신성분 검토를 통과한 자들이기에 3~4년 정도 군 생활을 하다가 당 학교나 정치대학으로 가서 교육을 받고 군 정치지도원이나 당 간부가 될 수 있다는 점일 것이다.

 이렇게 기초군사훈련 초기를 거칠 때 즈음이면 당에서 2차 신원조회를 실시한다. 이때 교육생들을 아버지의 자서전(쉽게 말하면, 그동안의 행적을 모두 적은 인생 단위 진술서)’ 제출을 요구받는다. 자서전까지 통과가 되면, 제식·사격·개인참호 구축·참호 연결·참호 전투요령·소대-중대 단위 전술지휘 등 장교로서의 기본군사훈련을 받는 동시에 수학·물리·항공기 관련 일반이론·항공기 전문 이론·사상과목과 같은 이론교육이 이뤄진다. 이론과목 중 가장 강하게 보는 것이 있다면 사상과목이다. 사실상 대부분의 이론 교육이 사상과목에 할애 되어있다고 봐도 무방한 정도다. 사상과목은 혁명사상, 김씨 부자 로작(路作. , 중앙군사위원회, 전원회의, 확대회의 보고서), 당 정책사가 있고, 여기에 부가적으로 사회일반과목을 이수하게 된다. 사회 일반과목은 변증법적 유물사관·정치경제학·남반부 관련 정보로 구성되어 있는데, 주로 자본주의 비판이 중심인 과목이라고 보면 된다.

 

 기초 이론교육과 기본군사훈련이 끝나면 각 항공기별로 초등비행교육이 진행된다. 사실 이 점은 기종의 차이가 있다 뿐이지 초등훈련-고등훈련-기종별 관숙비행이라는 방식에서의 틀에는 특이점이 존재하지 않는다. 전투기 조종사를 기준으로 하면, 초등비행은 2인승 훈련기인 Yak-18을 이용해 진행한다. 교관 1명 당 교육생 2~3명이 붙어 공중조작과 편대비행 등을 실습하는 방식이다. 교관과의 동승비행이 7~80회 진행되면 상급교원이나 대대장의 검열비행을 통과해야 고등비행훈련으로 넘어갈 수 있으며, 보통 초등비행훈련은 60시간 정도 진행하게 되어있다. 다만 문제가 있다면 교관이 하루에도 수십 번씩 똑같은 조종을 반복하다 보니 받는 스트레스를 교육생한테 풀어댄다는 것이다. 교육생이 조금이라도 실수하면 거침없이 욕을 갈기는 식으로 말이다. (필자가 군 생활할 당시 들었던 교육사령부 조종 교육에서 암암리에 이뤄진다던 체벌비행이 이 동네에도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체벌비행은 다른 게 아니라 후방석 교관이 G를 줘서 기체를 뒤집어 교육생의 몸에 부하를 줘 기절하기 직전까지 몰다가 도로 기체를 원상복구하는 것을 말한다.) 이 과정에서 고소공포증으로 항공기 탑승을 거부하거나 건강이나 습득상 기준에 미달되는 경우, 교관의 욕지거리에 욱해서 싸웠다가 평가에서 불이익을 받아 탈락하는 인원들이 발생하고, 결과적으로 초등교육을 이수한 인원은 90명 즈음 되는 인원은 70명으로 줄어들게 된다.

 

 초등비행훈련이 끝나면 본격적으로 고등비행훈련이 진행된다. 이때는 주로 2선급 병기에 해당하는 제트전투기를 가지고 훈련이 진행되는데, 보통은 MiG-15가 사용된다. 고등비행훈련이 시작되면 기계 부문에 대한 학습과 비행장 및 공중에서의 비행 규율에 대한 지상교육이 진행되며, 1개월 간의 이론교육을 마치고 나면 본격적인 비행실습이 이뤄진다. 여기서도 방식 자체는 초등비행훈련과 유사하며 차이점은 교육 이수기간이 늘어난다는 것이다. 이 시기부터 주간-야간 비행훈련 교육을 받고 조종술 시험을 치러 합격하면 소위로 임관하는 식이다. 이 과정에서 80여 명 남은 교육생들은 50여 명으로 줄어들게 된다. 물론 떨어졌다 해도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출신성분 토대를 가지고 정치대학을 가서 당 간부로 진입할 수 있기에 딱히 아쉬운 것은 없다고도 볼 수 있겠지만, 누구나 선망하는 비행사가 되고 싶다는 꿈이 거의 다 왔는데 중도에 좌절된 것에 대한 절망감은 당사자에게는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전투비행사를 포함해 수송기·직승기·폭격기 조종사와 항법사들까지 4~5년의 교육을 모두 이수하게 되면, 이들은 공군 소위로 임관하게 된다. 이 중 이론 시험과 조종술 시험을 각각 100점 이상 통과한 자들은 중위로 임관하게 된다. 이런 과정을 거쳐 조종 관련 인원은 연 200명 정도가 임관하게 된다.

 

+) 교육생 시절 생활에 있어 특기할 만한 것이 있다면 식사와 노력동원이 있을 것이다. 이 부분은 이웅평의 회고록을 많이 참조했는데, 나중에 이철수의 회고록이 나오면 업데이트될 수 있을 것이라 보인다.

 식사는 북한의 배급제에서 나타나는 것과 같이 옥수수쌀(옥수수를 쌀알 크기로 분쇄해놓은 것이라 보면 됨)과 백미를 혼합한 것으로 밥을 지어 지급하게 되어있다. 안 그래도 양 얼마 안 되는 거 균등하게라도 준다고 그러는 것 같은데, 우리가 군대에서 보는 것처럼 주걱으로 푸는 형태가 아니라 밥칼로 네모나게 잘라서 주는 식이다. 그래서 처음 보면 밥이 아니라 두부인가 오해하기 쉬운 모양이라고 한다. 반찬으로는 염장무와 고춧가루는 점처럼 박혀있는 정체불명의 염장 배추에 가까운 배추김치가 지급되었다고 이웅평은 증언했다. 이철수가 증언했던 염장무 3형제시리즈는 이때에도 유구한 전통을 자랑하는 반찬이었던 셈이다. (염장무를 가로로 썬 것, 세로로 썬 것, 동그랗게 썬 것을 별개의 반찬으로 취급한다는 소리다(...)) 그나마 국은 기름기가 조금 있기라도 했다지만, 1975년부터 공군 기술근무원들이 지급받는 5호 식사에서도 기름기가 다 빠지는 상황이 도래했고, 대부분의 북한 군인들이 먹는 1호 식사는 더 심각한 상황에 이르렀다. 1호 식사는 옥수수쌀로 지은 밥, 소금에 절인 무와 배추, 소금국 내지는 기름기 하나 없는 멀건 미역국이 전부인 식단이라고 보면 된다. 영양학적 고려는 일체 없는, 탄수화물만 겨우 공급하고 단백질이나 지방, 비타민, 무기질 공급은 거의 없다시피 하는 식사를 계속 주다보니 몸이 그나마 잘 버티는 사람도 밥 먹고 뒤로 돌아서면 배가 금방 꺼져버리는 지경이다. 그나마 버티는 사람은 다행이라면 다행이지만, 더 상황이 심각해졌을 때는 교육생의 40%가 각기병에 걸려버린 적도 있었다고 이웅평은 증언한 바 있다.

 그리고 탈북자들이 공통적으로 증언하는 노력동원은 공군 조종사 생도들이라고 해서 예외가 아니다. 똑같이 모내기 동원이나 국가 기간시설 건설 등 각종 노력동원에 나가야 한다. 이웅평의 경우, 1970년대 공군력 강화를 위해 공군대학과 별개로 비행군관학교를 건설하는 기간에 생도 시절을 보내다 보니 그곳에도 동원된 바 있었다. 사실 노력동원 자체는 북한만의 전유물은 아니다. 맑스의 노동가치설에 입각하면 농민은 자신의 생산물을 자신이 통제할 수 있지만, 노동자, 그중에서도 건설노동자는 자신이 만든 생산물을 자신이 향유할 수 없다는 문제가 생긴다. 노동 소외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이를 해결해야 하는데, 문제는 사람의 적성에 따라 직업을 선택하게 해야 한다는 점에 있다. 아무리 사회주의 국가가 개인에 대한 통제를 강하게 한다고 해도 대놓고 네 적성은 공사판 막일이다라고 말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 말이다. 그래서 사회주의권 국가에서는 주로 징역형을 선고받은 죄수들, 그 중에서도 파렴치범이나 강력범에게 노역을 시키는 겸 기간산업에 투입하는 경우가 많았고, 동독과 같이 기간산업 건설에 동원할 노동력을 확보하는 겸 양심적 병역거부자에 대한 대체복무의 일환으로 건설병(Bausoldaten) 제도를 이용하기도 했다. 문제는 북한의 경우, 시도때도 없이 공사의 비전문가인 일반 대중을 마구 끌어다가 적성 따위는 하나도 고려 안 하고 공사현장에 집어넣는 것도 모자라 공사장에서의 안전 보장 따위는 하나도 없고, 속도전을 내세운답시고 안 그래도 부실한 시공법으로 날림공사를 해대다보니 멀쩡한 기반 시설이 거의 없다는 점이다.

 

-2부에서 계속

관련글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