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부에서 계속
1. 귀순 조종사 대표, 이웅평
앞서 언급했다시피 북한군 조종사들의 삶은 사실 타국의 조종사 대우에 비하면 정말 지독하리만치 열악한 수준이다. 심지어 시스템적으로 모델이 된 소련 공군과 비교해 봐도, 국토 면적의 문제 때문에 지역별 편차가 벌어져서 받는 대우가 열악해지다 보니 그런 것도 아니고 경제가 멀쩡하던 시절에도 비행사들의 생활을 완벽하게 보장해주지도 못하는 것이 북한의 현실이다. 사실 사람들이 흔히 착각하는 것이 있다면, 우리가 그동안 받아온 반공교육도 있지만 한국 근처에 사회주의를 표방하던 국가들이 하나같이 나사가 한두 군데씩 나가버린 지금까지의 북한이나 과거 문화대혁명 시기 중국이었다보니 하는 것, ‘사회주의 국가는 인민의 생활도 제대로 보장 못 하는 주제에 불만 표시하면 다 끌고 가 죽이거나 수용소에 넣는다’이 있다. 그런데 그건 이 동네가 이상한 것이지, 엄밀히 말하면 현실 사회주의를 표방하는 국가권 내에서 비교적 멀쩡하게 돌아간 소련이나 동독의 경우를 보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물론 개인의 자유가 정치경찰에 의해 감시를 받거나 인민 개개인의 소비재 영역에서의 만족을 못 시키는 등 한계는 명확하지만, 적어도 우리가 아는 것과 같이 무조건적으로 탄압하는 것은 아니란 말이다. 다시 말해, 이건 국가 자체가 경영을 지독하리만치 못하면서 생색내기만 하고 있다고 밖에 볼 수 없겠다는 소리가 나오는 시스템인 셈이다.
이런 상황인 것에 더해 군사적 이유에서라도 적국, 특히 남한에 대한 정보를 집중적으로 학습해야 하는 북한 공군 조종사들은 당연히 비교대상이 생기니 자신의 처지와 비교할 수밖에 없고, 그 점에서 환멸을 느껴 탈북하는 조종사들도 생겨났다. 이들은 경제적 이유로 인해 생존에 문제가 생겨 탈북하기 시작한 1990년대 이후 탈북자라기보다는, 주로 정치적 이유나 정치-경제적 신념에 의해 탈북한 1990년대 이전의 1세대 탈북자(주로 지식인, 국가보위성 소속 보위지도원, 전방부대 병사나 군관 등)들의 대표격인 셈이다. 지금까지 남북이 분단된 이후 공군 조종사들이 귀순한 사례는 다음과 같다.
- 1950년 4월 리건순 중위. (Il-10을 몰고 귀순)
- 1955년 리운용, 리인선 소위 (Yak-18을 몰고 귀순)
- 1960년 로금석 상위 (당시 MiG-15를 몰고 귀순)
- 1960년 정낙현 소위 (당시 MiG-15를 몰고 귀순)
- 1970년 박순국 소좌 (당시 MiG-15를 몰고 귀순. 원래는 귀순을 의도하진 않았지만 설득 끝에 귀순)
- 1983년 리웅평 대위 (당시 MiG-19를 몰고 귀순)
- 1996년 리철수 대위 (당시 MiG-19를 몰고 귀순)
이 중 로금석 상위는 미국으로 건너가 살기를 희망해 미국으로 건너갔고, 정낙현 소위, 리웅평 대위, 리철수 대위는 특별임관하는 방식으로 군적을 변경해 대한민국 공군에서 군 생활을 하다 퇴역했다. 이번 주제를 다루는 글에서 마지막으로 다루는 내용은 대표적인 귀순 조종사 2명, 이웅평과 이철수를 다뤄볼까 한다.
이웅평(1954~2002)은 아마 ‘북한군 소속의 귀순 조종사’라고 하면 굉장히 유명한 인물일 것이다. 특히 1980년대에 기억이 또렷이 날 법한 나이대였던 사람들은 더더욱 이를 잘 알 것이다. 왜냐하면 그가 귀순할 때 서울을 포함한 전 지역에 훈련용이 아닌 실제 민방위 경계경보가 울렸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 때문에 ‘이러다 이산가족 되는 거 아니냐’고 불안에 떨었던 사람들도 꽤 있었다. 특히나 전투기를 직접 몰고 탈북해 온, 국가의 엘리트 중 하나인 공군 조종장교였기에 더더욱 뇌리에 강하게 박힐 수밖에 없는 배경을 가진 인물이었던지라 귀순 조종사의 대표라고 인식되는 것이라고 볼 수 있겠다.
그렇다면 이웅평은 왜 탈북을 결심했는가? 과거에는 원산 앞바다 휴양소에 떠밀려 온 삼양라면 봉지를 보고 귀순해 왔다고 알려졌지만, 다 따지자면 이것 때문만은 아니다. 아무리 북한의 상황이 경제적으로 열악하다고 해도 고작 ‘라면 맛이 궁금해서 넘어왔다’고 하면 그건 그것대로 코미디가 아니겠는가? 물론 이웅평 본인도 나중에 라면 봉지에 적혀있던 안내 문구나 소비자보호법에 관한 문구를 보고 그동안 자본주의를 비판하며 받았던 교육에 의구심을 품기 시작했다고 말했지만, 그것만이 전부는 아니었다. 사실 그가 귀순하게 된 주요 계기는 현재 북한 핵심 계층의 탈북 동기와 유사한 점이 많은데, 바로 경제적 자유 그 이상의 정치적 자유였다. 매슬로우(Abraham Maslow)의 욕구 계층 이론에서 알 수 있듯 인간은 기본적으로 생존의 욕구가 해결되면 더 높은 수준의 욕구 충족을 원하는 법이다. 그 높은 수준의 욕구 충족이 현대 국가 체제에서는 정치적 자유인 셈이다.
이전에 언급한 바와 같이 북한 공군 비행사들은 핵심 인원으로 분류되는 만큼, 고강도의 사상통제를 받기 때문에 그로부터 받는 스트레스나 현실과의 괴리감이 이만저만한 게 아니다. 거기다 군에서 이뤄지는 3중 감시 체제 역시 이웅평에게는 스트레스의 원인 중 하나였다고 후에 밝힌 바 있다. 북한군은 일반 군 간부 사이에서도 상호 간의 감시가 이뤄지지만, 당 조직과 보위부 조직을 이용해 서로를 감시하는 3중 감시 시스템으로도 상호 감시를 한다. 이웅평이 정치적 통제로 스트레스를 받았던 점은 바로 보위국 지도원이 개인 면담을 이유로 자신에게 접근해 보위지도선의 밀정 노릇을 요구한 것 때문이었다. 당시 그것 때문에 이 사실을 몰래 비행중대장에게 토로할 정도였으니, 그가 그 일 때문에 상당한 스트레스를 받았음을 알 수 있다. 여하튼 경제적으로 겪는 빈곤에 더해 정치적 생활의 면에서 가해지는 압박 때문에 그는 체제에 대한 의구심을 가지기 시작했고, 전투기 무전기를 이용해 몰래 KBS 방송을 청취하는 등 남한에 대한 호기심을 품기 시작했다.(*)
* :물론 북한 입장에서 이것은 굉장히 위험천만한 행동이다. 북한은 외부로부터의 정보 차단을 위해 일반 인민을 기준으로 모든 TV나 라디오를 사용하려면 사회안전성(우리로 치면 경찰)의 허가를 받고 쓰게 한다. 이때 사회안전성은 전자기기 사용 인가를 내주면서 회로기판에 납땜을 해 주파수를 고정하고 봉인지를 붙여버리는데, 봉인이 뜯어지면 즉각 정치범으로 간주하는 식이다. 특히 조종사들의 외국 방송 청취는 조종사 자체가 정권에서 밀어주는 핵심 인원이기 때문에, 공개적으로 처벌할 경우 발생할 사회적 파장을 고려해 교화소(교도소)가 아니라 보위국이 쥐도 새도 모르게 관리소(정치범 수용소)에 넣어버리거나 비밀처형해버릴 수도 있는 사항이다.
그 결과 그는 다음과 같은 생각을 굳히게 되었다. “나는 진심으로 인민을 위하는 남조선으로 가야겠다. 나를 그동안 속여온 수령이니 내가 그를 배신한다 해도 죄가 될 것이 없다.” 물론 당시의 생각을 이렇게 술회한 이웅평이었지만, 가족 단위로 다 넘어오는 것이 아닌 이상 모든 탈북자들이 그렇듯 가족들을 다 두고 온 것에 대한 죄책감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실제로 북한 정권은 이웅평이 귀순한 이후 이웅평의 일가를 모두 완전통제구역에 수감하는 것으로 대응했고, 가족들이 끝내 처형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이웅평은 그로 인한 죄책감과 스트레스로 인해 건강을 망치게 되었다. 이는 결국 그가 생각보다 일찍 세상을 뜬 원인이 되기도 했다.
그렇다면 그는 어떤 과정을 거쳐 넘어왔을까? 이번에는 이웅평의 회고록과 기타 자료를 통해 그 내용을 보도록 하자. 1983년 2월 1일, 당시 한국은 한미연합훈련 ‘팀스피릿 83’을 실시했다. 북한은 이에 대응해 팀스피릿 훈련 시작과 동일한 시기부터 준전시상황을 선포해 대응훈련을 진행하고 있었고, 이웅평은 이 시기를 탈출 기회로 잡았다. 그는 동경 126도 10분 선을 따라가는 정남쪽 항로를 비행 코스로 계획했다. 이 지점이 동경선을 그대로 따르기 때문에, 별다른 의심을 안 받으면서 항로 및 지형지물 연구가 가능했기 때문이었다. 또한 그는 상황이 여의치 않을 경우를 대비해 방송국 전파 발신원을 이용한 항법까지 염두에 두고 KBS 방송국 주파수 역시 확정해 두었다. 그는 여러 항로를 계산해 레이다에 포착될 위험성과 방공로켓 및 고사포 사격의 위험성, 적재연료량, 해상 방위판정 등을 고려해 최종적으로 중부 산악지대 레이다 사각지대를 따라 비행하여 탈북하는 항로를 선택하게 되었다.
1983년 2월 25일, 그에게 기회가 찾아왔다. 당시 그가 소속된 제1 비행사단은 태천에 위치한 반항공군 소속의 SA-2 대공로켓 포대의 훈련을 보조하는 한편 항공군 차원에서 지대공 미사일 포대를 타격하는 훈련이 계획되어 있었다. 가상적기 역할을 수행하도록 되어있었던 이 대위는 이때를 탈출 기회로 잡아 다음과 같은 물건을 챙기기 시작했다.
대대 기밀서류 보관소 전투편람, 전술토의 훈련 내용, 북한이 확보한 남한 측 비행장에 대한 자료, 신분 증명을 위한 출장증명서와 신분증(군관증), 화폐(당시는 3차 시리즈 북한 원이 유통된 지 얼마 안 된 시기. 3차 시리즈는 1979년 이전에 사용되었던 2차 시리즈와 1:1 비율로 교환), 남한으로 가져갈 비행지도 일부, MiG-19 조종술 지도서, 6.25전쟁 당시 공중전투 실화기록 책자, 연료 계산표 등의 자료
사실 그가 탈출에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어느 정도 운도 작용한 점이 없지는 않다. 훈련 당시 이웅평은 편대 후미기였는데 편대장이 직접 고개를 돌려 뒤를 보지 않는 이상 후미기가 뭘 하는지 볼 수 없다는 점이 첫째였고, 이 당시 계획된 훈련은 무선침묵을 유지하면서 편대장과 비행 행동을 맞추고 일시에 공격 및 비행임무를 수행하는 것이었기에 탈출이 가능했던 것이다.
당시 그가 사용한 방법은 후미에 있다가 편대장이 뒤를 못 보는 상황을 틈타 방향을 틀어 급강하를 시도한 뒤 계획된 항로를 타는 것이었다. 이때 사용한 방법은 공군 조종사들이라면 누구나 다 아는 방법인 전탐 기만술이었다. 이걸 알기 위해서는 레이다의 ‘목표거리 분해 능력’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레이다는 기본적으로 전파를 쏘아 어떤 물체에 반사되어 돌아오는 전파를 잡아내 위치를 추적한다. 문제는 전파가 반사되는 것만을 가지고 모든 물체의 위치와 거리를 다 잡아낼 수는 없다는 점이다. 이 때문에 생기는 한계 중 하나가 바로 ‘목표거리 분해’의 개념이다. 이는 복수의 목표물이 서로 300m 이하의 거리를 유지하며 밀집한 상태로 있으면 레이다는 목표물이 여러 개여도 1개로 인식하게 되는 것을 말한다. 이 점을 이용해 전투기 조종사들은 1대는 정상고도로 비행하고 1대는 급강하해 레이다 차폐 현상이 발생하는 사각지대로 숨어버리는 전술을 사용하곤 한다. 이웅평은 이걸 역이용한 셈이다. 그렇게 편대를 벗어난 이웅평은 골짜기와 산악 능선을 따라 8~900km의 속도로 저고도 비행을 하며 남쪽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이 장면을 쉽게 떠올리자면 영화 <탑건: 매버릭>의 협곡 비행 장면을 떠올리면 될 듯하다. (물론 영화에서 볼 때에나 박진감 넘치는 장면이지, 실제 조종하는 조종사 입장에서는 까딱 잘못하면 그대로 산에 부딪쳐 저세상 갈 수 있는 위험천만한 비행이다.)
1979년경부터 남한으로의 귀순 항공기를 막기 위해 반항공부대(방공부대)와 지상군 부대가 감시하는 휴전선 북방 20km 범위의 무조건 사격구역까지 통과한 이후, 해상 공역에까지 도달한 이 대위는 비상출격한 한국 공군의 엄호를 받으며 수원 10전투비행단 기지로 착륙하게 되었다. 다만 수원기지로 도착한 직후 그는 바로 전투기에서 내리지는 않았는데, 그 이유는 헌병 기동타격대가 와서 거총한 상태로 자신이 탄 전투기를 포위하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원래 이는 항공기 귀순상황 발생시 각 부서 대응 요령 중 헌병이 실시하는 대응 절차이긴 한데, 이걸 보고 이웅평 대위는 귀순하러 왔더니 적 취급한다고 여겨서 기분 잡친 것에 더해 정말로 헌병들이 자신을 쏘는 것이 아닐까 여겨서 권총을 쥐고 경계를 했다고 한다. 이때 헌병중대장이 ‘권총 풀어서 날개 위로 던져!’라고 외치는 것을 듣고 이웅평은 권총을 날개 위에 던진 다음 ‘나 총에 맞지 않게 해주시오! 나 할 말 많습니다!’라고 외쳤다. 무장해제가 된 것을 확인한 중대장은 헌병들에게 겨누고 있는 총을 내리도록 한 뒤 직접 그에게 다가가 잘 왔다며 악수를 청했고, 그제서야 이웅평은 경계를 풀고 수원기지에 안착하게 되었다.
그는 귀순 직후 자신이 남쪽으로 넘어온 이유를 밝히고자 기자회견을 요청했고, 그 내용은 1983년 3월 10일 <대한뉴스> 1427호 <자유를 찾은 날개>라는 제목으로 상영되었다. 그렇게 그는 대한민국에서의 새로운 삶을 시작했고, 한국인들에게는 ‘귀순용사의 대표’ 내지는 ‘네임드급 귀순 조종사’로 기억에 남게 되었다. 그는 당시 보로금으로 15억 이상의 돈을 지급받았는데, 이는 당시 한국과 미국이 전술 연구를 위해 필요하지만 그동안 확보하지 못한 전투기 실물을 가지고 왔다는 점, 군사학적으로 가치 있는 정보를 많이 가지고 온 점 등을 인정받은 것이었다. 거기다 북한 군사 체계 특성상 소련·중국과 연계된 점이 많기 때문에, 그가 가지고 온 정보로 사회주의권 국가의 항공 전술 제반사항까지 알아낼 수 있다는 점이 고평가되어 이렇게 된 점도 있다.
한편 이웅평이 귀순한 이후 북한 측은 조종사들을 선발할 때 출신성분 검토를 더 강화하는 한편, 조종사들에 대한 경제적 여건을 조금이나마 낫게 하려는 조치가 이뤄지기 시작했다. 시범 케이스로 몇 명을 잡아다 숙청할 것이라 여겼는데, 명함시계가 수여되는 등의 조치가 이뤄지면서 당시 북한 조종사들 사이에서는 사석에서 몰래 ‘가끔은 한 명씩 주기적으로 남조선으로 넘어가는 것도 나쁘지는 않겠다’는 농담이 돌기도 했다고 한다. (물론 공개적으로 이런 소리를 했다가는 그것만큼 참신한 자살 방법이 또 없을 것이다. 적어도 믿을 수 있는 놈들끼리만 사석에서 하는 소리였을 뿐.) 동시에 비행사들의 스트레스가 누적되어 순간 남쪽으로 기수를 돌리는 것을 막기 위해 출격 직전에는 조종사 개인에 대한 욕이나 호상비판을 통한 비난은 자제하는 분위기가 만들어지기도 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앞서 언급한 출신성분 검토 강화에서 대충 눈치챘겠지만, 정치 생활적 면에서 통제완화가 일어나지는 않았다. 이 점은 훗날 이철수 대위가 귀순하는 원인 중 하나가 되기도 했다.
2. 최후의 귀순 조종사, 이철수
이철수(1966~)는 지금까지 탈북한 공군 조종사 중 최후의 귀순자이자, 성공적으로 대한민국에 안착한 북한군 출신의 탈북자이기도 하다. 대한민국으로 귀순한 이후, 이철수는 1996년 10월에 대한민국 공군 소령으로 현지 임관하여 공군사관학교 35기 장교들과 동일한 처우를 보장받고 군 생활을 시작했다. 특별임관 당시 특기는 그의 출신을 고려해 조종으로 결정되었지만, 출신상의 특수성을 고려해 이철수 소령은 사실상 정보 특기로 활동했다. 이후 공군대학 교관, 항공정보단 북한공군전술분석실장 등으로 근무한 그는 재작년에 대한민국 공군 대령으로 예편해 현재 자신의 삶과 북한에 대한 연구내용을 기반으로 책을 쓰고 있는 중이다.
그는 1966년 함경북도 어랑군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리춘상은 함경북도의 유일한 여객기 취항 비행장인 어랑비행장 소속의 공군 기술자였기에, 이철수 역시 어릴 때부터 비행기를 많이 봤고 아이들이 한 번쯤은 해볼 법한 생각, ‘나도 비행기를 몰아보고 싶다’는 생각을 실행으로 옮기게 되었다. 다행히 그는 출신성분과 체력, 지력이 받쳐주는 행운아였고 그는 경성비행군관학교를 무사히 졸업해 1986년, 공군 소위로 임관하게 되었다. 1987년 중위로 진급한 이철수는 조선인민군 공군 제1 비행사단 57 추격기련대 1대대 비행사가 되었고, 이 당시 비행사들에게 전원 수여된 명함시계를 받게 되었다.(**) 이후 1994년이 되어서는 제1 비행사단 57 추격기련대 2대대 책임비행사가 되었고, 계급은 대위가 되어있었다. 이 기간 동안 그는 비행연한과 군 복무 기간, 3대혁명소조 활동 참가 공로 등으로 국기훈장 3급, 군공메달, 3대 혁명 훈장 등을 받았다. 어찌 보면 조선로동당에 충실한 전투비행사였던 셈이다.
** :비행사들에 대한 명함시계 지급은 1977년 김일성이 비행사 전원에게 오메가 시계를 선물로 주었던 것이 최초였다. 이철수는 이러한 명함시계 일괄 지급의 두 번째 수혜자였다. 북한에서 수령이 선물로 준 시계는 사실상 왕조 시대의 하사품과 비슷한 처우를 받기에, 명함시계 표창 대상자는 김일성 훈장, 공화국 영웅 칭호, 국기훈장 1급 수훈자와 마찬가지로 은퇴 이후의 ‘600에 60’(식량 배급 600g과 현역 시절 노임의 60%)를 보장받게 된다.
그렇다면 남 부러울 것 없던 영예를 누리던 그가 탈북을 결심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그에 대한 자세한 이유는 최근 들어서야 밝혀졌다. 1996년 5월 23일 수원 10전투비행단으로 귀순해 왔을 당시 기자회견에서 이철수 대위는 “이북 체제에서는 살 수가 없어가지고, 이남으로 넘어오게 되었습니다.”라고 자신의 귀순 경위를 밝혔고, 이후 진행된 언론 보도에서는 정치지도원과의 불화가 있었고 거기에 못 이겨 넘어오게 되었다고 밝혔다. 하지만 그 속사정은 생각보다 사소한 것이었고, 동시에 생각 이상으로 크게 번진 것이었다.
사건의 발단은 바로 자두농장에서 출발했다. 이 당시 김씨 일가가 먹는 과일의 당도를 더 높이겠다고 협동농장에서는 과일나무 밑에다 설탕 100kg이나 개고기를 묻기 시작했다. 물론 농학에 대해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들은 다 알겠지만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난다’를 정말 문자 그대로 1차원적으로 이해한 머저리 같은 짓이다. 그런다고 과일의 당도가 오르면 죄다 그런 식으로 과일 농사 지었지, 뭐 멍청해서 비료랑 물만 주겠는가? 표면적으로 보면 ‘수령님이 드시는 과일은 더 달고 맛있어야 한다’는 것를 행동으로 보여주겠다고 충성경쟁 차원에서 이런 행동을 벌인 것이고, 근본적으로 보면 사실상 사회주의는 갖다 버린 고대 신정정치와도 같은 북한의 정치적 상황을 보여주는 것밖에 더 되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협동농장에서 근무하던 노동자를 통해 그 사실이 새어나갔고, 그 노동자의 아이가 땅에 묻었던 설탕을 파 먹은 것이다. 이 당시는 고난의 행군이 오기 직전이었다. 이미 1980년대 후반부터 북한 경제의 문제점이 서서히 드러나면서 경제가 무너지기 시작했고, 북부지역은 아예 식량 배급이 끊어지기 시작한 상황이었다. 사실 1980년대 후반부터는 중심부인 평양시도 배급나오는 쌀을 조금씩 공제하다가 밀가루나 콩으로만 배급하는 등 배급 상태가 이상해진 상황이었고, 타 지역은 말할 것도 없었다. 어린 아이의 입장에서는 늘 굶어 죽기 직전만큼 배가 고픈 상황이 도래했고, 뭐건 입에 넣을 수 있으면 넣고 봐야 하는 상황이었던 셈이다. 그런데 이것이 그만 정치적 사건으로 비화한 것이다. 자두를 따 먹은 것도 아니고 나무 밑에 묻은 설탕을 파 먹은 것이 수령이 먹을 과일을 키우는 데에 손상을 주었다는 죄, 정확히는 ‘당의 유일사상체계 확립의 10대 원칙’(***)을 위반했다는 죄목으로 변했고, 그렇게 그 아이는 공개총살을 당하게 되었다.
*** : ‘당의 유일사상체계 확립의 10대 원칙’(현재는 ‘당의 유일적 령도체계 확립의 10대 원칙’으로 개명)은 조선로동당의 강령이다. 이는 사실상 사회주의 헌법이나 조선로동당 당령보다도 상위에 있는 법인데, 쉽게 말하면 수령을 신격화하는 내용으로 구성된 강령이다. 이 원칙의 위력을 한마디로 표현하면 다음과 같다. ‘북한에서는 사회주의 헌법 모르고는 살 수 있어도, 10대 원칙을 모르고서는 정치적 생명은 물론 육체적 생명도 보장할 수 없다’
아무리 수령결사옹위라는 이름으로 사상무장을 받는 조종사라고 해도 상식적으로 고작 8살밖에 안 된 아이를 잡아다 총살하는 것이 맞냐는 의문이 들 수밖에 없었기에, 이철수는 가장 친한 동기에게 ‘아무리 그래도 어떻게 8살짜리 애를 죽이냐?’고 속마음을 털어놓았다. 그런데 이것이 화근이 되고 말았다. 알고 보니 이 동기라는 자가 동기가 아니고 웬수였던 셈이다. 이 동기라는 놈은 다른 게 아니라 상호감시를 위해 당 조직이 심은 밀정이었다. 당연히 이철수의 발언은 당 조직에 고발되었고, 이철수는 이때부터 집중 공격의 대상이 되어버렸다. 앞서 이웅평이 귀순한 이후 정치 생활적 면에서 통제완화는 안 일어났다고 한 것을 기억할 것이다. 오히려 강화되었다. 이웅평이 귀순한 이후 북한 공군 비행사들 사이에서는 ‘당성 단련 강습’이라는 것이 생겨났는데, 거기에 이철수 대위가 비판 대상이 되어버린 것이다. 당성 단련 강습은 다른 게 아니라 1년에 2주간, 가장 큰 정치적 결함이 있다고 여겨지는 자를 연단 위에 세워놓고 비행사들이 그를 공개적으로 비난하는 것이다. 사상투쟁회의의 또 다른 형태라고 볼 수 있는데, 연단 위에 오른 강습 대상자는 자신에게 쏟아지는 비난과 고성을 다 들으면서 ‘예, 죄송합니다’를 연발하는 동시에, 자신에게 쏟아지는 공격의 내용을 다 받아적어야 한다. 이게 말이 좋아 단련이고 강습이지 사실상 개인의 인격을 짓밟는 정신적 고문과 다를 것이 없다. 한번 상상해보라. 나 혼자 연단에 서 있고 그 밑에서 70명이나 되는 자기 동료 상관 부하들이 전부 소리를 지르며 비난을 퍼붓는데, 여기서 어떻게 맨정신으로 버틸 수 있겠는가? 2시간 동안 이런 짓을 하게 되는데, 어떻게 이걸 당하고도 멀쩡히 살 수 있겠는가? (이미 세월이 수십 년 지났지만, 이철수 대령은 이때의 상황을 진술하면서 북받치는 분노와 억울함 사이의 무언가 때문에 말을 끝맺지 못했다. 그 사건이 그에게는 트라우마가 된 셈이다.)
이때부터 사상적으로 결함이 있는 자로 낙인이 찍히면서 속된 말로 ‘따’ 시키는 생활이 시작되었다. 당성 단련 강습이 끝나고 들어가니 동료 비행사들이 자신과 눈도 안 마주치려고 한다거나 사격 훈련할 때 중대 정치지도원이 자신을 향해 권총을 겨누고 있다거나 비행훈련 중에도 뒤에서 감시용 항공기가 따라붙는 식이었다. 어떻게 보면 이러한 사상통제가 오히려 조종사로서 가지던 자부심은 물론 있던 충성심도 다 없애버린 셈이다. 결국 1993년부터 이철수 대위는 이런 생활 속에서 더 이상 살 수는 없다는 생각 아래 귀순을 결심하게 되었다. 하지만 그 당시까지 이철수는 대한민국으로 넘어가야겠다는 생각을 굳히지는 않았다. 아무리 체제 내에서 시달렸다고 해도 그동안 적국으로 교육받은 국가로 넘어가야겠다는 생각을 하기도 힘들거니와, 자신이 탈북을 시도했을 때 가족들이 당할 고통을 생각하면 실행에 옮긴다는 것이 쉽지 않기 때문이었다. 그가 진짜 귀순을 결심한 것은 1996년 5월이었다. 그 당시 이철수는 대대정치지도원으로부터 다음과 같은 통보를 받게 되었다. “철수 동무, 이번 8월에 당성 단련 사상투쟁 대상으로 동무가 예정되었소. 일단 그리 알고 있으시오.” 그 통보를 받은 이철수는 도저히 믿을 수 없었다. ‘그렇게 나를 죽이려 들고도 또 이러는 것인가, 왜 내가 그리 되어야 하는 건가?’라는 의문 반 분노 반의 감정이 마음속에서 터지기 시작했다. 이철수는 이번 당성 단련 강습을 빌미로 자신을 죽이려 할 것이라고 확신했고, 이번에 오는 탈출 기회가 마지막이라고 생각했다. 물론 그 일이 절대 쉽게 옮길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귀순을 계획한 전날 밤, 잠자리에서 그는 자신의 행동으로 가족들이 당할 일을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1996년 5월 23일, 당시 제1 비행사단은 조종사들의 이착륙 숙달 훈련을 진행하고 있었다. 이철수는 이날의 훈련을 기회로 삼았다. 당시 동체 연료는 만재 상태인 2,110리터, 평안남도 개천비행장과 서울까지의 거리상 잘만하면 귀순도 가능했다. 훈련 도중 이철수 대위는 원래의 계획된 항로와 반대 방향인 서해 항로로 180도 변침할 수 있는 순간을 노렸고, 즉시 항로 변침을 시행에 옮겼다. 애초에 전투기가 전투 기동시 움직이는 속도 자체가 음속 단위이기에 한번 방향을 180도 틀어버리면, 뒤늦게 알고 추적한다고 한들 비상출력을 가동해도 전투기로 따라잡는 것은 불가했기에 이 방법이 먹힌 것이었다. 최고속도가 붙은 상태에서 이런 행동을 하면 더더욱 따라잡는 것이 불가하다는 것을 이용해 이철수는 편대를 이탈해 서해로 넘어가기 시작했다.
한편, 서해 상공 11km까지 접근했을 때, 한국 공군 측도 신원불명의 전투기를 레이다에 포착했고, 공군작전사령부는 즉시 가장 가까운 10전투비행단에 비상출동명령을 하달했다. 10전투비행단은 초계 중인 F-16 편대를 급파했고, 이철수 역시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F-16 편대를 확인했다. 자신을 겨누는 무장이 활성화되었다는 락 온(lock on) 경보가 계속 울리는 상황 속에서, 이철수 대위는 랜딩기어를 내리고 날개를 좌우로 흔들어 귀순 의사를 표시했다. (이 행동은 세계 공용으로 쓰이는 귀순 의사 표현 방법이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가 생겼다. 당시 엄호 대형으로 들어가 이철수의 미그기 옆으로 붙은 남측 공군 조종사가 물컵으로 물을 마시는 모양의 수신호를 보냈는데, 당시 북한 공군은 그런 수신호가 없었기 때문에 이게 무슨 뜻인지 몰랐던 것이다.(****)
****: 엄호 대형은 귀순 의사를 표시한 항공기 옆으로 1대가 붙고, 나머지 한 대는 귀순 항공기의 후상방에 붙는 대형이다. 옆에 붙는 항공기는 항로를 유도하는 역할을 담당하고, 후상방에 붙는 항공기는 혹시라도 귀순 항공기가 귀순을 가장해 공격을 시도할 가능성을 대비해 언제든 격추할 수 있도록 무장을 활성화하고 준비하게 된다. 사람으로 비유하면 한 명은 투항자를 안내하고, 한 명은 뒤에서 총을 겨누면서 따라가는 것을 떠올리면 되겠다.
사실 그 당시 엄호 편대 조종사가 보낸 수신호의 의미는 ‘지금 귀측에 연료가 얼마나 남았는가?’였다. 그런데 그 신호의 의미를 알 턱이 없는 상황에서 이철수는 연료까지 얼마 안 남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훗날 인터뷰에서 당시 상황이 워낙 급박하다 보니 고속도로에 착륙하는 것부터 시작해 비상탈출까지 모든 상황을 다 고려했지만, 고속도로에 차가 원체 많아서 비상착륙은 불가하다는 것과 함께 민가가 밀집해 있는 상황에서 비상탈출을 했다가는 주인 잃은 기체가 민간지대에 떨어져 쑥대밭이 펼쳐질 것이 분명하다는 생각에 결국 이 방안은 접고 가장 가까운 비행장을 찾다가 수원기지를 발견해 착륙하게 되었다고 밝혔다.
그렇게 아슬아슬하게 수원기지에 안착한 이철수가 대한민국 땅을 밟은 뒤 처음으로 던진 말은 뭐였을까? 다소 어이없게도 그가 처음 던진 말은 “야, 총 내려! 총 내려!”였다. 다른 게 아니라, 이 말은 아까도 말했던, 항공기 귀순 상황에서 조치를 위해 출동한 헌병 기동타격대원들이 자신을 향해 총을 겨누고 있는 것을 보고 외친 말이었다. 이철수가 이 말을 외친 이유는 이웅평과 유사하게, 귀순하러 왔더니 자신을 향해 총 겨누는 모습을 보고 기분이 잡쳐서 그런 것이었다. 물론 그것뿐만은 아니었고, 그동안 북한에서 호위부대와는 별개로 최고 엘리트로 대우받는 비행사라는 특성상 자신에게 병사들이 총 겨누고 있는 모습이 그닥 마음에 들지는 않았던 것도 일정 부분 있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고 그 말 듣고 진짜 총을 내리는 헌병들은 대체 뭐였을까...... 물론 그렇다고 해서 나라고 그 상황에서 안 쫄고 똑같이 소리치면서 ‘빨리 총 버려!’라고 외칠 자신이 있다고는 말 못하겠다. 가끔 하는 생각이지만, 실제 역사에서 이름을 남기는 자들은 안 쫄고 뭐라도 하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곤 한다.)
귀순 직후, 조사실을 거쳐 귀순 의사가 확인된 이철수는 10전투비행단 부단장과의 만남을 갖고, 기자회견을 통해 자신의 귀순 경위를 밝히면서 본격적으로 대한민국 공군 장교로서 남한에서의 생활을 이어가게 되었다. 그는 자신이 가지고 온 MiG-19 전투기와 정보제공료, 생활 정착금 등을 모두 합쳐 5억 원의 보로금을 받았는데, 당시 주목받았던 것은 백두산 권총과 그의 개인 수첩이었다.(*****)
*****: 당시 물가로 비교하자면, 한강 주변에 있던 아파트 시세가 2억 3천만 원 정도 하던 때였다.
백두산 권총은 체코제 CZ-75 권총을 복제해, 1984년부터 북한군이 장령들과 조종사 등 핵심급 군관(장교)들에게 지급한 신형 권총이다. 사실 남한 측 정보기관도 그 권총의 존재를 어느 정도 알고 있긴 했지만, 실물은 확보하지 못했던 것을 이철수가 가지고 온 것이었다. 사실 그것보다 정보기관과 군이 주목한 것은 그가 가지고 온 개인 수첩이었다. 이 수첩에는 약 86쪽 분량의 미그기 조작법과 비행 중 고장 발생 시 응급처치 요령이 빽빽이 적혀있었다. 교본이나 사용 설명서를 개인이 함부로 반출해서 가지고 다니는 것은 어느 나라 군대에서나 안 되는 것이지만, 그렇다고 머리에 모든 내용을 다 집어넣는 것도 한계가 있으니 해당 사항을 외우는 겸해서 수첩에 적어놓은 것으로 추정된다.
한편 당시 언론이 주목했던 것은 앞서 언급한 것에 더해, 그가 신고 있었던 발싸개와 돼지가죽으로 만든 비행장화였다. 당시 남측 언론에서 돈이 없어 발싸개를 지급받은 것이냐는 질문에 대해 이철수는 공군 조종사 정도 되면 군관들이 신는 전투화가 있으니 양말도 지급받지만 땀 흡수가 잘 돼서 발싸개를 신었다고 하면서, 북한군은 모두 발싸개를 지급받는다고 진술했다. 사실 그가 발싸개를 쓴 이유는 엄밀히 따지면 북한이 돈 없는 것 반, 소련식 비행화 특성상 양말보다 발싸개가 편한 것 반이라고 볼 수 있다. 일단 후자의 경우, 북한군의 비행사 복제 자체가 소련군 조종사 복제를 거의 모방했다는 점, 소련군 비행화가 우리가 아는 것과 같이 지퍼로 여닫는 워커 형태가 아니라 소련군이 쓰는 키르자 부츠를 변형한 형태인 점에서 출발한다. 워커형 전투화와 달리 부츠형 전투화는 발목을 꽉 조이는 형태가 아니다 보니, 양말을 신으면 발목 부분이 조금씩 흘러내리기에 발에 감은 뒤 발목에 묶어버릴 수 있는 발싸개가 더 편해서 쓰는 것이 후자의 내용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전자의 속을 보면 북한이 돈 없다는 점은 못 가린다고도 볼 수 있다. 일단 이 발싸개는 원래 한쪽 발에만 감을 분량을 반으로 잘라서 쓰고 있었다는 점이 문제였다. 원래 발싸개는 양말과 똑같이 발을 완전히 감쌀 수 있는 분량의 천으로 감는데, 이철수가 당시 착용하고 있었던 분량대로면 발뒤꿈치는 완전히 못 감싼다는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사실 지금 필자가 생각했을 때, 당시에 딴지 걸려면 발싸개보다는 돼지가죽으로 만든 비행화로 더 걸 수 있지 않았나 생각한다. 그 당시 우리나라 소득 수준이 지금보다 높지 않았던 1980~90년대에도 국군 전투화는 기본적으로 소가죽이었던데 반해, 북측은 그나마 군관들에게만 지급하는 가죽 전투화조차도 대다수는 돼지가죽으로 만들어 쓰고 있었던 점을 고려한다면 말이다. (굳이 소가죽이냐 돼지가죽이냐 걸고 넘어지는 이유는 간단하다. 돼지가죽 자체가 원체 뻣뻣하다 보니 착화감이 안 좋아서 예로부터 조금이라도 살림 편다 싶으면 신발 재료로는 안 쓰기 때문이다.)
한편, 그는 제대 후 유튜브에 공개한 영상에서 남한에서의 군 생활이 갖는 장점을 언급했는데, 그것은 바로 동기생 문화에서 나오는 동지애 내지는 전우애였다. 아무래도 가장 믿었던 동기에게 배신을 당했던 기억이 있었던 것이 그에게 있어 전우애가 가장 큰 장점으로 다가오지 않았나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3. 글을 마치며
이번 글은 처음에 밝힌 바대로 흥미 본위에서 출발한 것이다보니, 뭔가 뚜렷하게 의미를 부여하기는 힘들지 않을까 싶다. 그렇다고 북한을 빗대서 우리의 상태를 논하자니, 국가 간 감정은 다 차치하고서라도 도저히 객관적으로건 물질적으로건 비교 기준점이 하나 맞는 것이 없어서 뭐라고 해줄 말이 마땅치 않다는 것이 문제가 아닐까 생각해본다. 굳이 언급하자면 장교들의 처우 문제에 대해서 신경을 써야 한다는 것이 있지 않을까 싶다. 물론 ‘북한처럼 파탄난 국가랑 우리랑 비교할 게 따로 있지’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솔직히 앞에서 필자도 언급한 것이 있으니 인정한다. 다만 최근 들어서 이슈가 되고 있는 초급 간부들의 이탈 문제나 인력의 질 저하 등 문제가 이만저만이 아니라는 점에서, 이런 생각 역시 마냥 무의미하다고는 볼 수 없을 것이다. 막말로 우리가 수십 년 전과 같이 못 먹고 못 살던 시절의 고민은 벗어났지 않았는가? 그러면 이제 상대적 빈곤을 더 고민해야 하는데, 지금 우리 군 간부들이 군대를 벗어나려는 상황이 딱 상대적 빈곤에서 기인한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맑스는 『자본론』에서 자본주의 시스템이 임금을 결정하는 구조를 논하는데, 그는 재생산에 필요한 영역은 그 국가의 역사적·문화적으로 처한 상황에 따라 정의된다고 논했다. 그럼 우리는 그러한 구조적 역할을 제대로 한다고 할 수 있는가? 유감스럽게도 지금의 상황은 아니라고 말하는 것 같다. 북한 공군 조종사들의 경우야 극단적 사례라고 치부할 수 있지만, 물질적으로건 정신적으로건 빈한해지면 누구나 등을 돌릴 수밖에 없다. 아무리 애국심이나 사상에 호소한다고 하더라도 이건 인간의 본성을 고려하면 어쩔 수 없는 문제다. 누군가는 항상 미국을 모델로 삼아야 한다고 떠든다. 그러나 제발 우리가 빈곤에 절어있던 시절을 벗어나 어느 정도 여유 있는 삶을 살 수 있게 되었다면, ‘나라에 요구하기 전에 너는 나라를 위해 뭘 했냐?’는 논리만으로 우악스럽게 밀어붙일 수 있는 시대가 이미 지났다는 것도 깨달을 때가 되었다는 걸 알았으면 한다. 원래 전쟁에서 이기는 쪽은 잘 하는 쪽이 아니다. 바보 같은 행동을 덜 하는 쪽이다. 그 점을 잊을 때, 군이 1차적으로 망가지지만 그와 비슷하게 사회도 서서히 망가진다는 말로 이번 글을 마칠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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