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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론] 역사를 대할 때는 무엇이 필요한가?

역사

by HUMAN H 2024. 12. 29. 1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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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은 누군가가 쓴 글에 기반하여 내가 편집한 글이다. 원 저자는 따로 있지만, 누구인지는 명확히 알 길이 없음을 유감스럽게 여긴다. 내가 말할 수 있는 선에서 적당히 가공을 거쳐 쓴 글이란 점에서 온전히 내 저작물이라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다만 원본이 역사학을 마주하면서 가져야 할 철칙을 압축한 것이기에, 소개할 법하다 여겨 이렇게 편집해본다.

 

 

1961년 발매된 『 역사란 무엇인가 』 의 초판본

 

 

 사학과를 지망한 학생들이 자주 받는 질문은 많이 있지만, 대표적인 것 중 하나가 바로 왜 역사를 공부하려 하나요?”. 다는 아니지만 이렇게 답하는 학생이 있다. “일본과 중국의 역사 왜곡에 맞서는 선봉에 서고 싶습니다.” 또 이렇게 답하는 학생들도 있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겐 미래가 없다고 해서 역사를 공부하려고 합니다”, “불변의 역사적 진리를 탐구하고 싶습니다”, “공부를 열심히 해서 역사의 정의를 세우고 싶습니다”. 이들의 표정은 자못 비장하며, 어조는 확신에 차 있다.

 사실 나 역시 이러한 학생 중 하나였다. 적어도 고등학생 때까지는 말이다. 그동안 배운 것이라거나 대중매체를 통해 본 역사 다큐멘터리를 통해서 만들어진 관점은 그것이 맞다고 여기게 했다. 그랬기에 대학에 들어와 역사학을 배우면서 가장 충격을 받은 점이 이러한 확신을 깨는 작업이었다.

 대부분의 사학과가 그렇겠지만, 사학과에 처음 들어온 1학년들이 제일 먼저 듣는 개론 수업에서 이뤄지는 것은, 다름이 아니라 이러한 확신’, ‘관점을 깨는 작업이다. 비유하자면, 미대 입시를 거쳐서 들어온 미대생들이 제일 먼저 듣는 말이 ‘지금까지 너희가 배운 입시미술체는 빨리 버려라’인 것과 비슷하다고 볼 수 있다. 에드워드 카의 역사란 무엇인가는 사실 대입 준비에서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역사책이지만, 그 책의 내용을 제대로 이해한 이는 얼마 없을 것이다. 나도 그 책을 제대로 읽은 것은 대학에 들어온 1학년 여름방학 때였다. 대부분은 ‘역사는 현재와 과거의 끊임없는 대화이다’(History is a continuous process of interaction between the historian and his facts, an unending dialogue between the present and the past.) 라는 경구는 알지만, 그 이상의 전체 내용까지 아는 경우는 얼마 없다.

 물론 역사란 무엇인가가 원래는 카가 대학에서 강의한 내용을 편집해 엮은 책인 것에 더해 내용이 워낙 어려워서 그렇다는 비판 역시 있지만, 역사학이 전개되는 전체 과정을 어렴풋이 알아가는 과정에서 몇 명은 내가 알던 역사학이랑 다르다, 나랑은 안 맞는가보다라고 생각하면서 전과(轉科)를 선택한다. 모든 학문이 다 그렇지만 역사학은 대중이 아는 것과 실제 전공자의 관점에서 보는 관점이 명확히 갈리는 경향이 강하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렇다면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서, 질문해 보겠다. 사학과에서는 그 관점을 왜 깨는 걸까? 가장 큰 이유는 학문은 신념이 아니라 토론과 회의의 장이기 때문이다. 종교는 신실한 믿음, 신념이 강력한 무기가 될 수 있지만, 학문은 신념만으로 무장하는 순간 더 이상 학문이 아니게 된다. 신념만으로 무장한 학문은 스스로 목숨을 끊은 존재가 된다. 비유를 들어보자. 기독교에서의 교리는 믿음 그 자체의 대상이자, 시시비비를 가리는 존재가 아니다. 일단 그것을 믿고 난 이후에야 다른 이야기를 할 수 있다. 성직자나 교인에게 어떻게 성모께서는 처녀의 몸으로 예수를 낳았습니까? 과학적으로 그게 가능합니까?’라고 물어봐야 소용이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교리이니까. 경학(經學)도 마찬가지이다. 절대적 규범이나 진리를 상정하고 그것을 탐구하는 분야이다. 성리학자에게 가서 세상이 이()와 기()로 이뤄져 있다고 했는데, 그걸 어떻게 증명합니까? 그게 정말 검증할 수 있는 겁니까?’라고 말한다고 해서, 뾰족한 답이 안 나오는 것과 같다.

 하지만 카가 말한 것처럼, 역사학은 현재와 과거의 끝없는 대화의 과정이고, 동시에 역사가와 그가 대하고 있는 사실간의 연속적인 상호작용 그 자체이다. 역사가에게 있어서 절대적 진리가 있다면, ‘세상은 끝없이 작동하고 변한다뿐이다. 그것 외에는 어떠한 진리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기에 해석의 학문이기도 한 것이다. 물론 우리는 이 점을 잘 알지 못한다. 왜냐하면 우리가 주로 경험하는 역사학은 정규 교육과정에서 익힌 역사 수업이나 누군가의 관점이라는 렌즈를 이미 통과한 상()을 보기 때문이다. 전자의 경험으로 인해 우리는 역사는 지식을 외우는 과정 그 이상 이하도 아니라고 생각하게 된다. 그러나 사실 이것은 우리가 역사학에 접근하는 준비 단계만 경험했기에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기도 하다. 일단 사유를 하려면 어떠한 지식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사유의 기반을 만드는 과정이 정규 교육과정에서의 역사 수업인 셈이다.

 

 

 두 번째로 볼 부분은 역사학이 해석의 학문이라는 점이다. 역사학은 사료를 기반으로 증거를 제시해야 한다는 규정을 지키는 선이라면, 다양한 해석의 자유가 부여되는 학문이기도 하다. 이 점에서 우리가 흔히 역사를 배워야 한다고 말하면서 자주 인용하는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라는 말을 액면가 그대로 믿으면 안 된다고 할 수 있는 이유가 나온다. 역사는 어떠한 신념이 들어간 것이기 때문이다. 비장미가 느껴지기도 하는 말이지만, 이 말은 자신과 다른 관점을 제시할 자유를 허용하지 않을 위험성을 내포할 가능성을 무시할 수 없다. 하늘이 아는 진리가 있으니 우리는 그것을 세우기만 하면 될 뿐 탐구할 필요는 없다는 말이 얼마나 무력하게 무너졌는지, 역사가 현실정치의 무기로 이용되면서 바로 세우기만 하면 된다는 말이 얼마나 공허한 말이었는지, 우리는 지난 역사를 탐구하면서 알 수 있었다.

 

 

 역사학이 회의(懷疑)의 학문이어야 한다는 말이 선뜻 이해가 안 갈 수도 있다. 그럼 역사 왜곡하는 자들을 가만히 둘 거냐고 누군가는 말할 것이다. 그러나 문제의 본질은 그 역사를 왜곡하는 자들이 자신들만의 신념을 숭배하면서 역사를 재단한다는 것이다. 나는 보통 이것을 역사학을 야매로 배우면 벌어지는 일이라고 설명한다.

 역사학은 기본적으로 역사적 지식을 머리에 주입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지식을 익힌 다음 역사학이 나아가는 목표이자 본질은, 진리라고 여겼던 사고방식이나 가치관이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을 깨우치게 하는 것이다. 내가 당연하다고 여겼던 것은 특정한 역사적 과정을 거쳐 특정한 시기에 형성된 것이고, 그것도 결국 변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깨닫게 해주는 것이다.

 예를 들어보자. 우리는 1884년 갑신정변을 다음과 같이 평가한다. ‘이상은 컸고 또 당시 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해 필요했지만, 그것을 이룰 실질적 방안이 부족해 실패한 개혁.’ 그런데 이러한 평가도 사실 처음부터 이렇게 확립된 것은 아니었다. 갑신정변에 대한 평가는 오랫동안 실패한 것에만 초점을 맞춰 부정적인 평가 일색이었다. 그 이유에는 식민지화를 피하지 못했던 당대를 부정적으로 평가했던 맥락이 있었다. 그러다가 새로운 시각이 1960년대의 북한으로부터 제기되었다. ‘갑신정변은 비록 실패했지만, 지배 계층이 나서서 사회를 근대적으로 변혁하려 시도한 최초의 사건이었다. 동시에 사회주의로 나아가기 위한 전 단계인 부르주아 혁명을 지배층이 이루려고 한 시도였다.’* 이러한 점이 수용되면서 종래의 역사학은 갑신정변의 결과뿐만 아니라 과정의 의의도 같이 보기 시작했고, 그 결과 탄생한 것이 지금의 우리가 배우는 갑신정변에 대한 평가였다.

 

(* 물론 북한을 통해 직통으로 들어온 해석은 아니었다. 이 당시 북한의 학설을 주로 접하는 방법은 일본을 통해 간접적으로 연구성과를 확인하는 것이었다.)

 

 

 사실 역사학을 공부하면서도 자신의 생각에 대한 의심의 준비가 안 돼 있고, 오히려 역사에서 생각의 정당성을 보증받는 데 몰두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면 그렇게 믿으면되지, 굳이 역사를 공부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역사는 과거와 현재의 대화이지만 주로 과거가 말하게 해야지 현재의 내가 너무 많은 말을 해서는 곤란하다. 과거에 좀 더 귀를 기울여야 한다. 이러한 것을 정면으로 대놓고 거스르는 것의 예가 있다면, 그게 바로 환단고기를 신봉하는 유사 사학(pseudo-history)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동시에 의대 소아과 수업에서 어린이는 어른의 축소판이 아니다라는 말을 항상 하듯이, 사학과는 ‘역사는 현대의 잣대로 판단해서는 안 된다’라는 말을 항상 듣는다. 과거에 대한 해석을 하고 있으면 자주 보이는 현상이자 필히 경계해야 하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지금 역사를 해석하는 내가 절대자라는 생각이다. 그러다보니 역사학을 야매로 하면 일종의 선민의식을 가지기도 하는데, 그 결과 중 하나가 역사를 끌고 와서 소위 정치질하는 집단의 발생이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과거를 살았던 자들은 결코 멍청하지 않았다. 지식의 수준에서는 차이가 있지만, 어떠한 신념이나 내외적 요소가 개입하지 않는 이상 당대인들은 당대에 할 수 있었던 최선의 선택을 해왔다. 그것은 지금의 우리도 똑같다. 더 거칠게 말하자면, 당대인들은 현대인들만큼의 지능을 가지고 있고, 현대인들은 당대인들만큼이나 멍청하다. 아닌 것 같은가? 그럼 자신의 머리를 믿고 주식이나 코인에 돈 넣었다가 꼴아박는 것은 뭐라고 설명할 것인가?

 과거 역시 사람이 살아온 시간이다. 우리도 미래를 알 수 없듯 당대인들도 자신에게 닥쳐올 미래를 알지 못한다. 그렇기에 그들은 몸에 땀과 흙, 피를 묻혀온 것이다. 박박 기고 구르면서 목숨을 이어갔고, 역사를 만들어 온 것이다. 그렇기에 완전무결할 수 없다. 우리가 그들을 쉽게 재단하는 이유는 우리가 이미 일이 일어난 과정을 다 알고 있다는, 별것 아닌 것 같아도 매우 큰 메리트를 가지고서 시공간을 바라보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동정심을 가지라는 말이 아니다. 최소한 그들이 그리할 수밖에 없었다는 이해를 기본으로 하고 역사를 바라봐야 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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