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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념과 숭배, 내면의 유물: 운동권의 끝물이 바라보는 학내 운동

기타/아무말 대잔치

by 한제 閑齊 2025. 3. 3. 17: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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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지만 민주공화국이 아니었다. 적어도 처음 40년 동안은 말이다. ‘박사이승만은 초대 대통령이었지만, 역사가 옹호해 주지 않는 대통령이 되었다. 대통령이라는 그릇이 자신에게 너무 작다고 여겨서였을까, 조선의 임금이 되고 싶었던 그는 끝내 하와이로 가야 했다. 자기더러 물러가라고 외치는 친애하는 국민들을 두고서 말이다. ‘혁명을 일으켰던 별 두 개짜리 장군 박정희는 불행한 군인을 자처하며, 18년간 한국을 통치했다. 누군가에게는 조국 근대화를 이룬 고마우신 그분’으로, 다른 누군가에게는 대한민국의 헌법을 유린한 반란군 수괴이자 한국적 민주주의라는 사슴을 데리고 와서 준마라고 우긴 자로 기억되었다. 그는 중앙정보부장이 쏜 총에 맞으면서 일대의 혼란을 남기고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그 혼란 속에서 불행한 군인이 키웠던, 불행해야만 하는 군인이 나왔다. “나는, 각하께서 이루신 위대한 혁명이 실패하리라는 생각을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어!”라고 외쳤던 또 다른 군인 전두환은 자신의 롤모델을 본받고 싶어서였을까. 그는 광주에서 기억과 역사 모두에 길이 남을 학살을 벌이고서, 자신이 존경한 자의 뒤를 따랐다.

 

 

 마그리트의 <이미지의 배반>과 같이, 파이프를 보고서 파이프가 아니라고 외치는 40여 년의 부조리극을 보는 또 다른 자들이 있었다. 그들은 어느 만화에서 나오는, “작별이다. 내가 없는 시대에 태어난 것뿐인 범부여.” 같은 대사를 실현할 무력은 없었다. 그러나 그들은 계란으로 바위를 쳤다. 학교 정문 위에 올라가 전투경찰들에게 화염병을 던지기도 하고, 공장에 위장취업을 하기도 하고, 독서회를 모아 조잡하게 번역된 일본발 사회과학 서적을 읽기도 했다. 그러다가 학교에 깔린 사복형사들에게 팔다리를 붙잡혀 경찰들을 싣고 다니는 닭장차에 쑤셔 넣어지기도 했고, 여관 같은 건물로 끌려가 답을 알고 있는 물맛을 보기도 했다. 그러나 계란으로 바위를 치던 그들은 기어이, 모래가 된 바위를 밟고 선 병아리를 만들었다. 우리는 계란으로 바위를 치던 자들을 고립시키려고 어용 언론이 그들을 칭할 때 만든 이름을 지금도 쓴다. 그 이름은 운동권이다.

 파이프를 파이프라고 할 수 있게 된 다음에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운동권은 새로운 질문 앞에 섰다. 그 질문 앞에서 운동권은 수많은 계파로 쪼개졌다. 그 과정에서 그들은 점점 분열했고, 새로운 사회적 의제를 가지고 오기도 했다. 그러나 그들은 괴물과 맞서 싸우면서 자기 안에 괴물이 있는 줄은 몰랐다. 그들은 민주주의를 외쳤지만, 일상에서는 권위주의에 익숙한 자들이었다. 군사정권이 보내는 프락치에 맞서 싸우다가 사건도 일으켰다. 19849월에는 축제 기간에 학교에 들어온 민간인을 프락치로 오인해 서울대 민간인 고문 사건을 일으켰고, 198910월에는 만화가 읽고 싶어서 연세대 동아리 만화사랑에 들어갔던 동양공업전문대학생을 프락치로 오해해 죽였던 설인종 고문치사 사건을 일으켰다. 운동권 내부에서 쌓이던 모순은 결국 1996813일에 터졌다. 78.15 범민족대회 준비를 위해 한총련(한국대학총학생회연합)이 연세대학교로 모였고, 경찰은 교통 중대나 행정계에 있던 의무경찰까지 긁어모아 만든 110개 전투경찰 중대로 토끼몰이식 진압을 시작했다. 운동권이 연대 항쟁이라고 부르는 연세대 사건은, 1주일 동안 유혈 대치 끝에 860여 명의 사상자와 5,000여 명의 연행자, 파괴된 연세대 건물을 남겼다. 연세대 사건을 기점으로, 대학 내 운동권은 여론에 외면당하면서 몰락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학교 정문 위에 올라가서 살인마 전두환 타도하자를 외치며 화염병을 던진 사학과 선배이자 지금의 동양사 담당 교수님, 시대정신이 죽었다며 관을 짊어지고 학교에 왔던 선배는 전설로 남았다. 2010년대까지 운동권은 등록금 문제와 관련된 시위에서 보이는 존재로 모습을 드러냈다. 나는 그러한 2010년대 후반에 운동권을 1년 동안 경험해 본 인간이었다. 학교에 입학한 그날부터 1년 동안 나는 문과대 안에서 운동권의 끝물로 기억되었다. 다시 학교에 돌아왔을 때, 내가 알던 운동권의 모습은 사라져 있었다. 가끔은 이렇게 생각해 보았다. 1학년 생활은 지금 내가 내뿜고 있는, 허공으로 흩어지고 있는 담배 연기와 같은 것이었을까? 운동권의 존재를 알았던 내 동기들은 어떤 생각을 했을까? 한때의 동지였던 동기들, 그리고 그 생활이 싫었던 동기는 운동권을 어떻게 생각할까? 나는 그것을 보고자 했다.

 

 이제는 막연한 기억 속으로 흘러든 때지만 잊을 수 없는 2018, 대학에 입학한 내 동기들은 1년 전 대통령을 탄핵하는 것을 보았다. 그러한 시대에서 18학번은 정의를 향한 열정을 가졌다. 문과대학 벽면에 그려진 벽화, 전남대와 함께 대한민국에 2점만 남은 학내 민주화 운동 벽화가 그려진 공간에 있었던 문과대 학생들은, 사자상 앞에서 최후가 되었던 새율제(새내기 율동제)를 준비하면서 사회운동의 중심에 와있다는 것을 체감했다.

 그러한 생각을 하는 와중에 선배로부터 제안이 들어왔다. “갈 데가 있다.”, “사회적으로 의미 있는 일 한 번 해보지 않겠냐?”라고 하면서 데리고 갔다. 그렇게 간 곳은 장위동에 있는 궁중족발이었다. 20182월부터 젠트리피케이션 문제로 경찰과 물리적으로 대치했고, 철판을 용접해 이중문까지 만들며 농성했던 곳이었다. 그렇게 그곳에서 하룻밤을 보냈다. 나와 함께 운동권에 들어갔던 내 동기는 사회운동에 대해 동의하는 바가 있었기에 발을 들였다. 자신이 생각하기에 전부는 아니더라도 사상적 위치나 정치적 입지에서 동의하는 바가 있었기에, 세월호 서포터즈 활동에 대해서는 정말로 동의했기에, 운동권에 발을 들였다. 416일을 낀 토요일에 세월호 추모관을 찾아갔고, 그곳에서 헌화하며 유가족들을 직접 만나기도 했다. 여름방학에는 주한 일본 대사관 앞에서의 수요집회에 참석하고, 통일선봉대 급까지는 아니어도 통일 관련 시위도 2번 참석했다. 그러나 동시에 그때부터 심적 동요가 있었다. “거기서 외쳤던 구호 중에 인상 깊은 게, 그거였어. ‘이석기를 석방하라.’ 통일관에 대해서는 그분들 생각에 어느 정도 공감하긴 했지만, 나는 이 부분에서는 달랐으니까. 그리고 페미니즘 논의가 나왔을 때, 논의 중에 극단적인 얘기가 없진 않았거든. 그 두 가지에서 좀 흔들렸어.” 7월부터 그는 운동권의 생각이 자신과 맞지 않다고 느꼈다. 그리고 함께 활동하는 사람들로부터 진보대학생네트워크에 가입할 것을 권유하는 분위기가 강해졌다. 더 있다가는 사실상 강제가입이 될 거 같다는 생각이 들면서, 거리를 두는 것만이 이 집단에서 나올 수 있는 유일한 길임을 느꼈다. 그렇게 그는 나와 비슷한 시기인 20191월에 운동권을 떠났다. 운동을 지도하던선배와 최후의 삼자대면을 한 끝에.

 

 반() 운동권으로 돌아선 것은 아니었다. 노동운동 단체에서 간첩이 나오는 것을 보면서 자정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지만, 노동운동 자체를 혐오하게 된 건 아니었다. 재벌 총수 하나가 감옥에 간다고 그 기업이 망하면 애초부터 시작이 잘못된 것이니 국가가 사법부에 입김을 넣어가면서까지 살려줄 필요가 없다는 생각은 변함이 없었다. 소수 재벌에 의존하는 경제 체제가 그리 건강한 체제가 아니라는 생각도 변함이 없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래디컬 페미니즘이 시끄러운 소수와 주류 사이의 무언가가 되는 걸 보면서, 그는 회의적인 관점으로 돌아섰다. 그는 운동권에 가장 큰 회의를 느낀 순간을 통일문제를 대할 때라고 말했다. 20184월 판문점 남북정상회담을 보며 기대를 품었다. 그러나 도발은 그치지 않았고, 정권도 교체됐다. 유물인지 망령인지 알 수 없는 집단처럼 무력 통일을 하자는 생각에 동의하진 않았지만, 현실적으로 불가능에 가깝게 되었다는 회의에 이르게 되었다. “다시 할 거냐고 물으면 절대 아니오긴 하지만, 한 거 자체를 후회하냐 하면 후회할 일은 아닌 것 같아.” 어쨌든 의미는 있었던 일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그리고 그 운동권을 바라보는 또 다른 동기가 있었다. 똑같이 활동 참여 권유를 받았지만 직접 운동 현장에 나가지는 않았다. 1학년 때부터 주 단위로 글쓰기 훈련을 시키는 사학과 특성상 바쁘기도 했거니와 안산에 살다 보니 통학에만 4시간을 쓰고 있었다. 솔직히 쉬고 싶어서 안 갔지만, 사회운동을 권유한 선배가 밥을 3번씩 사줬기에 아주 안 보기에는 미안한 마음이 들어 선배를 만났다. 하지만 그 만남이 오히려 독이 되었을까. 장난조로 이야기했다지만 너 극우 보수 꼴통이냐같은 소리가 듣기 좋은 것은 아니었다. ‘이거 안 하면 너는 쓰레기다식의 가스라이팅까지 경험하면서 가까이하고 싶다는 생각이 없어졌다. “그래서 5월에 광주 기행 가자고 했을 때, 자연스럽게 거절한 것 같아. 일단 내가 그런 일을 겪었고, 나랑 친한 너희들이 운동하는 과정에서 힘들어하는 걸 봤기 때문에 싫어하게 된 거지.” 그렇게 그는 관찰자가 되었다.

 그는 자신이 관찰자의 시점에서 봤을 때, 사회운동 참여를 권유했던 선배라는 필터를 통해 운동권을 보면서, 광신에 가깝다는 느낌을 받았다고 털어놓았다. 개인적으로 선배란 사람과 얘기도 많이 했지만, 오히려 선배가 불쌍한 놈이라는 생각이 강해졌다. 대자보를 쓰면서 학과 사람들과의 상의도 없이 학과 일동의 명의로 대자보를 붙이는 어리숙한 행동을 하는 바람에 학번 그룹에서는 완전히 소외되었고, ‘호적 파이네, 마네소리가 나올 정도로 가족과도 사이가 좋지 않았다. 선배가 그저 소속감과 자기만족이란 감정에 기대어 사회운동을 한다고 생각했다. 결정적인 것은 심심하면 미군 철수얘기하던 사람이 군대 언제 갈 거냐는 질문에는 나는 군대 최대한 미룰 거다.”라고 답하는 것을 들었을 때였다. ‘이 사람들은 대책이 있는 걸까?’ 문제점을 지적하는 것 다음인,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모른다고 당당하게 말하는 것에서 대책 없는 집단이라는 생각이 강하게 박혔다. 사회운동과 관련된 주제로 대화하면서 논리적으로 답변해 줄 수 있는 사람이 주변에 없었던 것도 컸다.

 

 종교인은 믿음만으로 무장해도 신실한 자가 되지만, 사회운동가가 믿음만으로 무장하면 그가 내세우는 이념의 생명은 끝장난다. 돌이켜 보면, 나는 운동권이었던 당시보다 그 이후였던 2020년부터 이론 공부를 열심히 했었다. 비번 시간에 침대 위에서 접이식 책상을 펼치고 몇 안 되는 휴대폰 사용 시간을 이용해 운동권 계파와 이론에 관한 사항을 연습장에 정리해 나갔다. 복학해서는 자본론수업을 들으면서, 처음으로 자본론을 제대로 읽었다. 바꿔 말하면 운동권에 있을 당시에는, 사회운동 이론을 진지하게 공부해 본 적이 없었던 셈이다. ‘교양 사업이라는 이름으로 이론 공부를 아주 안 한 건 아니지만, 당장 사회에서 벌어지는 사회 현안에 대한 정보 습득이 주였다. 이론과 실기가 병행되어야 하는데, 시위 참여라는 형태의 실기만 들입다 판 결과는 이론적 근거의 빈약함이었다. 타인에게도 동의를 끌어내려면 이론과 논리로 무장해야 하는데, 구호만 들고 오니 반감만 사는 것은 필연이었다.

 

 운동권을 떠난 A나 처음부터 관찰자로 남았던 B, 2019년부터는 운동권을 잊고 살았다. 아니, 잊으려고 했다. 20193, 선배란 자가 입학식 날에 신입생들을 꼬드겨 3.1 운동 정신 계승 집회라고 속여서 반미집회에 데리고 갔다는 것을 훗날 친해진 후배들을 통해 듣고서 운동권에 넌덜머리가 났다. 그리고 학과 학회장이 되면서 팔자에도 없던 학생회에서 활동했고, 그 덕에 학과에서 놀기와 학과 운영 업무에 시간을 쏟았다. 그렇게 운동권 당시의 일은 기억 속으로 사라져 갔다..

 

 지금은 운동권을 아는 자가 많지 않다. 대다수는 운동권이라는 용어를 들으면 그게 뭐냐고 되묻는다. 5월마다 진행되던 농활도 없어졌고, 봄마다 있던 세월호 서포터즈 같은 조직 단위의 캠페인도 없어졌다. 이한열 열사가 활동했던 연세대 만화사랑에도 민주화 운동 관련 물품은 남아있지 않다. 학내 운동 당시 쓴 깃발이 있긴 하지만 그걸 신경 쓰며 사는 부원은 없다. 무엇이 이런 모습을 만들었는가? 흔히 코로나가 만든 물리적 단절을 들곤 한다. 근거가 빈약한 의견이라도 사람 간의 대화에는 감정이 섞이기에 거리로 나가자!’라는 구호가 실현될 여지가 충분하다. 그러나 강제적으로 거리가 확보되면서 근거가 빈약한 부분은 더 잘 보이게 되었고, 사람 간의 감정이 섞이는 유대는 설 자리를 잃었다. 그 과정에서 알게 모르게 감정에 일정 부분 기대 왔던 운동권은 활동의 동력을 잃었다는 것이다. 아니면 경제적으로 점점 각박해지는 상황 속에서 대학생이 더 이상 사회운동의 중심축이었던 소 부르주아로 남을 수 없게 됐다는 주장 역시 할 수 있다.

 

 하지만 그것만이 전부는 아니다. 세월호를 둘러싼 갈등에서 우리는 찬반 갈등은 보지만 각 진영의 의견이나 안산의 상황까지 잘 알지는 못한다. 안산 사람 B는 그것을 알기에 운동권을 비판적으로 보게 되었다. “그때 단원구 분위기가 암담해졌어. 상권도 날아가고 단원고는 한 학년이 삭제당한 거잖아. 안산이 안 그래도 범죄 이미지에, 외국인 노동자다 해서 우중충한 도시거든. 그러다 보니 반대하는 사람들은 분위기 얘기를 한단 말이지.” 덧붙여 이런 말을 했다. “나는 추모관 지어야 한다고 생각해. 근데, 추모관 짓는 실제 비용은 얼마나 되는가, 정말 500억이 들어가야 하는가에 대해서는 설명을 할 수 있어야 하는데, 제대로 알아보긴 했나 싶더라고. ‘난 쟤네랑 소통 안 해같은 벽이 있다고 느꼈어. 삼국지연의보면 의병 모집해 황건적 토벌하지? 그러고 나서 해산하라 하면 절대 해산 안 해. ‘우리는 이미 피로 뭉친 사이기에 안 그럴 겁니다거린다고. 정당한 구호로 뭔가를 일궜으면, 돌아가서 할 일 하면 되는데 그러지 않는다고.”

 어느 해적 만화에서나 볼 법한 의리감 충만한 대사는 창작물이기에 멋진 법이다. 그러나 현실에서 그런 말을 하고 있다면, 일이 어그러지는 순간 그 의리는 언제 있었냐는 듯이 사라지는 법이고, 그 자리에는 난장판과 쌈박질만이 남게 된다. 그리고 그 뒷면엔 온갖 보이지 않는 싸움이 일어나는 법이다. 그리고 그 싸움은 운동권-비운동권의 싸움이 아니라 사람 간의 싸움, 인간관계에 의한 파벌 싸움이 되어버린 지 오래였다. 파벌 싸움에 대해서도 몰랐고, 알기도 싫었기에 중립으로 남고자 했지만, 이미 권력의 공간에 들어온 순간 그럴 순 없었다. A는 그 순간을 이렇게 회상했다. “어느 순간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지면 죽일 듯이 싸우다가도 합쳐지고, 그걸 보면서 나는 뭘 위해 여기에 있었나 싶더라. 우리가 입학했을 때 우리 과 14학번 운동권 선배가 총학 나갔다가 떨어졌고, 2020년이 그 운동권 후신과 비운동권이 경합해서 운동권이 마지막으로 총학생회 했던 때였지. 이후에 나왔던 우리 과 출신 총학생회 후보는 NL이랑 PD 잡탕이었고, 결국 출마한 것도 우리 과 안에서의 인맥 싸움이 엮여 있으니까.”

 

 학내 운동권은 단순히 경제적 이유로 명줄이 끊어지지 않았다. 그리 보는 것이야말로 도식적 해석일 것이다. 사람이 모이는 이상 인간관계에 의한 싸움은 어쩔 수 없이 일어난다. 그리고 그것은 거시적으로 보이는 사회운동의 생명을 좌우하는, 다소 어처구니없어 보이는 요소가 되기도 한다. 그러나 사람 잡는 총알도 따지고 보면 1cm도 안 되는, 손톱만 한 쇳조각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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