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사학(史學)을 전공하는 사람이다. 보통은 사학과 재학 중이라고 하면 알아듣는 사람들도 많지만, 그게 뭐 하는 과냐고 묻거나 가끔은 사회학과를 말하는 것이냐고 되묻는 이들도 있어서, 최근에는 역사학과 다닌다고 말하기도 한다. 여하튼 그 질문 이후에 따라오는 다음 질문은 이것이다.
‘그럼 너는 왜 사학을 전공으로 선택했냐?’
이는 가장 심오한 질문이자 모든 사학과, 더 나아가 모든 인문학도들이 받는 근본적인 질문이기도 하다. 그와 동시에 사람들이 가장 이해하기 어려워하는 답변을 가지는 질문이기도 하고 말이다. 주로 이런 말을 하면 자주 하는 답변은 크게 2가지이다. ‘정말로 내가 사람들이 살아오면서 만든 과거를 알아가는 것이 재밌어서’라는 답변과 함께, 항상 따라오는 교훈주의적 사관이 그것이다. 다시 말해, '인간의 학습능력이 그다지 좋지는 않지만 그래도 과거에 이런 짓을 한 걸 알아야 최소한 학습효과를 이용해 그딴 x신짓을 덜 할 것이라 기대라도 할 수 있다는 데에 이유가 있다'라고 말이다.
이번에 나는 그 외에 하나를 더 추가해볼까 한다. 그것은 바로, 사람의 살아온 제(諸)요소를 연구하기에 생각하게 되는, 과거의 사람들이 한 행동에 대한 최소한의 이해라는 것이다.
나는 생활체육의 일환으로 검도부 활동을 하고 있다. 물론 동아리에서 활동한 것과 대회에서의 결과는 별개이지만, 나는 검도를 건강을 챙기는 수단이자 내가 평생 할 수 있을 법하다 여기는 스포츠 중 하나로 생각하고 사는 중이다. 검도에 대해 아시는 분들이라면 이 부분에 대해 알 텐데, 얼마 전부터 경기에서 쓰는 등띠(선수 구별을 위해 등에 다는 띠)와 판정기의 색, 도복의 형태에 있어 규정이 변경되었다.
* 등띠, 판정기: 기존에는 청색-백색을 사용했지만(청백기), 국제 규정에 맞춰 홍색-백색으로 변경(홍백기)
* 도복 형태: 기존에는 시합에서 요판형 도복을 불허하고 벨트형 도복만을 허용했으나, 금년 초부터 요판형 도복도 착용 허용
이 두 규정의 공통점은 바로 검도 종주국인 일본이 내세운 국제 규정대로 대한검도회가 시합 규정을 변경한 것이다. 이 점에 있어, 이전부터 검도를 오래 해온 선배들 사이에서도 그러했고, 지금 활동하고 있는 동기들도 규정 변경에 대해 많은 말이 하곤 했다. 그때 나온 얘기 중 하나가 이것이었다.
‘이제서라도 바꿀 거였으면 굳이 우리끼리만 따로 노는 규정을 굳이 붙들고 있었을 이유가 있었냐?’
물론 이 말이 틀린 말은 아니다. 솔직히 대한검도회에서 내세우는 규칙과 국제검도 시합 규칙 사이에 차이가 있기에, 대한검도회 소속 한국인 검도 선수의 입장에서는 두 규정을 다 알고 있어야 한다는 점에서 약간의 귀찮음이 수반되는 것 역시 사실이니 말이다. 그리고 국제 규칙이 멀쩡히 있는데, 굳이 별도의 규칙을 만들어 적용시키는 것이 상당히 비효율적이라고 여기는 시각도 한몫했을 것이다.
다만 이러한 점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그런 점을 마냥 멍청한 짓이라고도 할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일단 우리나라에 검도가 들어오게 된 과정을 생각해 본다면 이해가 조금은 될 것이다. 사실 검술 자체야 어느 나라에서건 다 있었지만 지금과 같은 형태로 스포츠화 된 것은 일본이 주도권을 가진 것 역시 사실이다. 무술의 일종이고 결과적으로 ‘총을 든 무사’를 양성하려 한 것이 일본군, 일본경찰의 출발점이었다 보니 자연스럽게 검도는 군경의 훈련 과목으로 자리를 잡았고, 식민 지배라는 역사적 시기를 겪으면서 한국도 검도를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한국에서 검도가 퍼지게 된 시작점도 경찰, 군, 제국대학 체육과 술과(術科)가 중심이었다. 이러다보니 항상 검도계에 달렸던 꼬리표가 있다. ‘왜색(倭色)’. 요즘은 이런 얘기를 잘 안 하지만, 내가 어릴 때까지도 애들끼리 얘기하다 보면 태권도 배우는 애들이 자주 하는 말이 그거였다. ‘야, 검도는 일본 꺼 아니냐. 왜 태권도 냅두고 검도 배우냐?’
검도의 종주국이 일본인 것이야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지만, 우리에게 있어 근대 일본과의 관계는 한국인에게 있어 콤플렉스인 것 역시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다. 해방이 되고 나서 전후 일본 내에서도 미군정이 검도를 일본군의 대표적인 요소로 여겼기에 통제하려 한 것을 지금의 형태로 규정을 바꿔 살려놓았는데', 해방된 한국이라고 다를 것이 있었겠는가. 거진 한 세기가 흐른 지금의 시점에서 봐도 욕 나오는 것이 일제강점기인데, 그 시절은 그 시기를 다 겪은 이들이 두 눈 시퍼렇게 뜨고 살아있던 시기였다. 거기다 그 시절 한국인이 검도를 배울 방법은 군, 경찰과 밀착하는 것뿐인 것도 있었으니, 한국인의 시각에서 검도는 가증스러운 일제의 유물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을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살아남으려면 ‘왜색’을 지우는 것뿐이었을 것이다. 그렇기에 청백기를 적용하고, 시합 전의 준거를 없애고, 하카마와 똑같은 형태인 요판식 도복을 경기에서 착용하는 것을 불허한 것이다. 그것이 지금까지 이어지다 근래에 들어 없어진 것이다. 물론 이제는 그 시절을 겪었던 선배들도 상당수가 역사 속 인물이 되어버렸고, 시간이 흐르면서 ‘아무리 일본 놈들이 미운 짓만 골라서 한다고 해도, 국제 스포츠 규정과 민족 감정은 별개로 봐야 하지 않겠는가’라는 시각이 힘을 얻으면서 사람들의 생각 역시 바뀐 점이 금년부터의 규정 변경이라는 결과를 낳은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 예컨대, 가슴 찌르기 금지, 다리걸기 등 체술(體術) 사용 제한 등이 그것이다. 현재 다리 걸기는 일본경시청검도대회에서만 허용된다.)
물론 왜색을 지우려 한 시도가 과하다 보니, 한국에서의 전통검술을 복원하는 과정에서 일어난 문제라거나 한국도 전통적으로 검술의 종주권을 가졌다며 억지스러운 파자(破字)와 해석을 하여 검술의 역사를 설명하려 하는 등 유사사학에서 벌이는 행동과 똑같은 폐단이 일어났던 것 역시 부정할 수 없는 과거이다. 그 점까지 감싸줄 마음은 전혀 없고 역사 앞에서 그럴 권리도 나에게는 없지만, 이러한 모습을 보면서 나는 이 글을 쓴다. 역사를 배우는 이유 중 하나는 이러한 과거 사람들의 행동에 공감하지는 못해도 최소한 이해는 하게 해주는 단서를 준다는 것에 있다고 말하며 말이다.
그리고 실제로 이 말을 하면서 그때의 대화를 마무리했지. “야, 그래도 지금까지 배운 거 이럴 때라도 써먹네. 역시 학과 짬밥을 괜히 먹는 게 아니에요.”(...)라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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