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직히 출판사나 신문사에서 ‘고전 100선’, ‘꼭 읽어야 하는 고전’ 등등의 광고 카피를 달고 나오는 것에 대해 나는, ‘꼭 그리 해야 하냐?’고 반문하는 사람이다. 애초에 무언가를 읽고 싶으면 그건 개인이 선택할 몫이지 남이 정해주는 것을 그대로 읽는다는 것도 웃긴 일이라 여길뿐더러, 너무 속이 보이는 상술 같아서 그리 썩 좋아하지는 않는 것도 그런 생각의 원인일 것이다. 여하튼 우리가 살아가면서 흔히 말하는 고전을 다 읽지는 않더라도 그 일부는 읽어봤을 것이다. 정규 교육과정에서 접했을 수도 있고, 대학 입시 때문에 읽었을 수도 있고, 그것도 아니라면 매우 드문 확률로 본인이 찾아서 읽었을 수도 있을 것이다. 물론 나 역시 고전을 자주 접할 수밖에 없는 사람이긴 하다. 그게 내 일이니 말이다. (정확히는 그게 일인 사람이 되려고 하는 것이지만 말이다.) 그럼 우리는 왜 고전을 이야기하고 그걸 찾아서 읽을까? 이번에는 이 점을 좀 이야기해보려 한다.
일단 고전은 우리가 봤을 때 낡은 기록이라는 점에서 구식과 큰 차이가 없어 보인다. 그러나 명확한 차이를 주면서 정의를 내리자면 다음과 같다. 전통과 구습의 차이점과 똑같다. 고전은 원시적이지만 다시 꺼낼 가치가 충분한 것이고, 구식은 다시 안 꺼내고 싶은 것이다. 물론 고전은 마크 트웨인의 말마따나 ‘아무도 안 읽었지만, 읽었다고 주장하는 무언가’이기도 하다.
그럼 좀 더 자세히 보도록 하자. 보통 사전에서 고전은 다음과 같이 정의된다.
“예전에 만들어진 것으로 시대를 초월하여 높이 평가되는 문학예술작품.
원래는 오래된 서지(書誌)나 전적(典籍)을 뜻하였으나, 단지 고풍(古風)이란 뜻을 넘어서 복잡하고 심오한 의미를 지니고 있으며, 주로 예전에 저작된 모범적이면서도 영원성을 지니는 예술작품을 뜻한다.”
이 정의에서 볼 수 있듯 고전은 시간이 지나도 가치를 인정받는 무언가로 정의된다. 그러나 그 시간을 견디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보통 한 텍스트가 고전으로 인정받기까지 걸리는 시간은 최소 2세대에서 1세기이기 때문이다. 물론 그 시간의 흐름 속에서 잊히지 않는 것 자체도 어렵지만, 더 큰 문제는 한 사회의 문화·사회·언어·관념이 시대의 변화 속에서 계속 변하기 때문에 그걸 다 포괄한다는 것이 절대 쉽지 않다. 그래서 어떤 텍스트가 고전으로 인정받기가 매우 어렵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는 반대급부로 고전으로 진입하는 우리에게, 진입장벽을 높이는 존재가 되기도 한다. 그 고전이 신간이었던 시절, 그러니까 처음 세상에 나왔을 당시의 언어·사회·심상적 맥락 등 사회적 요소나 환경·분위기가 지금과 판이하기에, 우리가 그것을 읽어가면서 텍스트도 해석해야 하는 이중 작업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보자. 고전을 읽으면서 이런 질문을 할 수 있다. ‘왜 자유나 권리, 인권을 그렇게 장황하게 설명하냐?’ 그냥 ‘자유’라고 써놓으면 되는 것을 왜 굳이 구속당하지 않을 권리니 재산권의 자유니 행복추구의 권리니 신성불가침이니 하며 쓴 것일까? 쓴 사람들이 자기 식자층인 거 자랑하려고?..... 일 리는 없겠지. 그건 그 텍스트가 쓰일 당시에 그런 개념이 없었거나, 있더라도 매우 불충분했기 때문이었다. 예컨대 ‘재산을 가질 자유’라는 것을 명확하게 규정하지 않던 시절에는 왕이 마음대로 남의 재산을 강탈하거나 돈 빌리고 ‘먹튀’해버리는 상황이 충분히 가능했다. 그리고 이건 실제로 있었던 일이다. 대표적으로 프랑스 왕실이 성전기사단에 돈 빌리고 나서 갚아야 할 때 되니까 기사단에 ‘악마 숭배’ 혐의 씌워서 기사단을 해산하는 것으로 빚을 ‘청산’해버린 것이 그 예다. 어떤 개념을 처음부터 만들거나 그 틀을 공고히 한다는 것이 철학적 사유만큼 매우 어려운 것임을 감안해야 한다.
또는 이런 질문을 할 수 있다. ‘아니 인류가 읽을 가치 충분하다면서? 그런 놈들이 왜 노예제의 효율성을 얘기하고 ’사람 위에 사람, 사람 밑에 사람‘을 정당하다고 거리냐?’ 이것은 당대가 가진 편견이나 잣대, 시대별로 어떤 제도를 인정할 수밖에 없는 사유가 각 시대마다 상이함을 감안해야 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경우이다. 즉, 우리가 당연하다고 여기는 것이 다른 시대로 가면 ‘그게 무슨 허무맹랑한 헛소리냐?’라고 반박당할 수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고대 그리스에서 노예제의 효율성을 언급한 이유는 그 시대의 생산양식 특성상 그것이 자연스럽다고 여겼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생산양식의 발달 정도가 그리 높지 않았기에 노예노동이 필요하다고 여긴 시대 분위기, 전쟁포로로 잡히거나 경제적 계약을 이행하지 못했기에 그 대가로 인신의 권리를 속박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여긴 당대의 관념을 감안하고 읽어야 한다. (사실 이런 사고에는, 우리가 노예제 이야기하면 16~17세기 구라파 양놈들이 만든 거지 같은 흑인 노예제를 흔히 떠올리게 되는 것도 원인 중 하나이다. 사실 그게 워낙 뇌리에 강하게 박히는 국면이니 말이다. 물론 고대라고 노예제가 인간적이지는 않았지만, 고대 그리스-로마 노예제는 그것과는 좀 달랐다.)
또 다른 예를 들어보자. 유학(儒學)에서 위계적인 계층질서를 옹호하거나 괴력난신을 배제하면서 인간세계의 근본적인 정신세계에 관한 질문에 답해주지 못하는 것을 흔히 비난하는데, 이 점도 이유가 없지는 않다. 공자가 유학을 만든 춘추전국시대는 자유를 강조하기보다는 차라리 계층 질서를 세워서 사회를 안정시키는 것이 더 중요한 시대였다. 왜? 춘추전국시대는 군웅할거의 시대라고 쓰고, 진짜 난장판 그 자체였으니 말이다. 이게 무슨 말인가, 당시 상황은 ‘인간이 어떻게 그런 짓을 할 수 있어?!’의 단계를 넘어서 ‘아니, 진짜 이런 짓까지 한다고?’의 단계였기 때문이다. 진짜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 그 자체의 시대였기 때문에, 공자는 이런 답 없는 혼란을 끝낼 방도로 인(仁)과 예(禮)를 제시하면서 위계적인 사회질서를 혼란을 끝낼 방법론으로 내세운 것이다. 괴력난신 배제나 사후 세계관을 안 세운 것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공자는 예가 실종되어 난장판 그 자체가 되기 이전이었던 주(周) 왕조를 이상적이라고 보았고, 그 주가 은(殷) 왕조의 점복이나 인신공양 등을 타파하면서 일어난 왕조였기에 공자 역시 그런 점에서 귀신을 논하지 않은 것이다.
물론 고전에 대해서도 말이 많기는 하다. 그 ‘인류의 보편가치’, ‘인류의 고질적 문제에 대한 철학적 해결책’이라는 것이 결국 누가 내놓은 것인가? 보통은 남성이거나 서양 세계의 남성이었다. 여성이나 동양, 제3 세계에 대한 목소리는 부차적인 것이 되었고 이에 대한 비판이 20세기 중반부터 제기되면서 결국 고전 안에서도 헤게모니 싸움이 전개되었다. 뭐, 그런 점에서 고전의 종류가 더 늘어났기에 보는 이로 하여금 ‘그럼 뭘 읽으라는 거냐? 고? 짜증이 올라올 수도 있겠다 싶지만, 결국 그 안에서 또 살아남는 것이 더 인류의 보편가치에 부합하는 고전으로 인정받기까지의 과정이 지금의 모습 아닐까 나는 생각한다.
그럼 다시 돌아와서, 근본적인 질문을 던져보도록 하겠다. 왜 우리는 고전을 읽으라는 소리를 들을까? 왜 사람은 고전을 읽을까? 여러 가지 답이 나올 수 있을 것이다. 어떤 이에게는 돈 버는 것이 목적일 수도 있을 것이다. 오디오북을 만든다거나 다이제스트로 콘텐츠를 만들어서 파는 등 루트만 잘 판다면 그것도 가능하다. 하지만 그게 확실한 수입원이 된다고 보장은 못 하기에 그렇게 말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또 다른 경우라면 자신의 지적인 면을 자랑하기 위해서가 있을 것이다. 뭐, 어떤 이에게는 이게 맞는 말이 될 수도 있는데, 통상적으로 이렇게 말하는 경우는 거의 없을 것이다. 그 이유를 쉽고 간단하게 말하자면, ’ 진짜 없어 보이니까 ‘ 그렇겠지.
굳이 답을 내려보자면 이렇지 않을까 싶다. 이 세상의 창조물 중 아주 새로운 것이 없기 때문이다. 보통 인간은 무언가를 만들 때, 완전히 새로 만들기보다는 기존의 요소를 응용하는 경우가 많다. 그 이유는 그것이 위험부담을 조금이라도 덜어주기 때문에, 그리고 인간의 위험을 피하려는 본능 때문이다. 그건 도덕의 문제가 아니다. 다만 그것에 독창성이 조금씩 부여되기에 변화가 일어나는 것이고, 그렇기에 고전을 읽음으로써 세상이 어떻게 돌아갈지를 대략적으로나마 유추할 수 있기에 고전을 읽는 것이라 할 수 있겠다. 또한 인류에게 있어 사상이나 감정 등은 인류 전체 단위로 볼 때 소통에 유리한 측면이 되기도 한다. 일단 인간 사회에서 문화가 서로 달라도 감정 등의 맥락에서는 크게 차이가 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 감정을 연결해 주는 매개체 역할을 고전이 할 수도 있는 것이다.
결국 인간이 하는 질문, “세상은 무엇이고 인간은 무엇인가?”는 계속된다. 그렇기에 고전은 계속 읽히고, 이 점에서 과거/동시대와 소통하는 창구가 될 수 있기에 고전이 계속 읽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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