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과거 이 블로그의 주인장 되는 사람이 현역으로 군복무하던 시절, 인트라넷 카페 <휴머니스트>에 작성한 글을 복원한 것이다. 다만, 당시 글을 쓸 때는 지금처럼 인터넷에 마음대로 접근할 수 없어 머리 속에서 생각한 것과 기억에 의존해 글을 쓰다 보니, 사실관계가 맞지 않거나 숫자에서 오류가 있어 이러한 부분은 수정하였고, 다시 글을 읽으면서 발견한 비문과 논리구조 상의 오류 역시 고쳐 이 블로그에 올린다.
당시 내가 쓴 글에 관심을 갖고 읽어준 모든 이들에게 감사함을 담아, 그 당시 나와 함께 동고동락한 동기들을 생각하며 이 글을 다시 백업한다.
전우님들, 안녕하십니까. 여전히 국방부 시계가 안 멈춘 어느 평범한 군사경찰입니다. 이번에는 약간은 흥미성 위주인 글로 써볼까 싶어서 뭘 쓸까 고민하던 중, 모택동 개인에 대해 가장 내부적이고 세밀한 정보를 담은 책으로 평가받는 『모택동의 사생활』의 내용을 중심으로 모택동의 개인적 면모에 대해 얘기해볼까 합니다. 그럼 거두절미하고 바로 본론으로 넘어가보도록 합시다.
1. 단순한 공산주의 정치가 그 이상의 남자
우선 오늘 다룰 남자, 모택동에 대한 간략한 개요부터 정리하고 넘어가보도록 합시다.
모택동(毛澤東)
-1893.12.26. 淸朝 호남성 출생
-1976.09.09. 중화인민공화국 북경시 사망
-최종학력: 호남성 장사 제1 사범학교 (지금으로 치면 중등교육 이수)
-배우자: 총 4명 (이 중 4처이자 4인방의 일원이었던 강청(江靑,1914~1991)이 유명)
-자녀: 총 4남 2녀 (이 중 6.25 전쟁 때 전사한 장남 모안영(毛岸英, 1922~1950)이 유명)
만약 혁명가가 되지 않았더라면, 이름 있는 고전학자나 작가로 이름을 남겼을 법한 사범학교 출신의 모택동은 20세기를 휩쓸었던 사회주의에 매료되면서 사회주의 혁명가로서의 길을 걷기 시작합니다. 그 과정에서 그는 어떻게 빈농(貧農)들을 이끌고 폭력혁명을 이끌며, 기존의 정권을 전복시킬 것인가에 대해 계속 고민을 해왔죠.
장개석의 중화민국 남경정부 수립과 4.12 쿠데타, 강서 소비에트에서의 중화소비에트공화국 선포와 대장정의 선언서, 중-소 조약에 의한 소련의 지원과 무자비한 병력투입을 통한 국공내전에서의 승리, 그리고 1949년 10월의 중화인민공화국 선포. 그 과정에서 모택동은 경쟁자들을 모두 내치고 독재자로서의 권력을 공고히 합니다. 그의 독재는 사실상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이전부터 진행되어온 셈입니다. 사실 안 그랬다면 그가 20년 넘게 권력을 공고히 잡았을 수도 없었을 테고, 사후에도 그의 후계자들이 그의 후견인을 자처하는 노예로 남지 않았겠죠.
보통 우리나라에서는 공산주의 정치가 내지는 대약진운동과 문화대혁명으로 자국에 대한 자폭 팀킬을 거하게 시전한 독재자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만....... 사실 실상은 상당히 복잡한 인물이 그이기도 합니다. 특히 사상가로서, 정치가로서의 면을 보자면 말이죠.
사상가로서의 그의 모습을 보자면, 그는 일종의 이단아이자 새로운 계파의 창시자라 볼 수 있을 겁니다. 그는 소련식 사회주의를 농업 중심국가였던 중국의 실정에 맞는 형태로 변용해 자신만의 사회주의를 만들었고, 한때는 ‘제3의 사회주의’로까지 평가받는 사회주의 노선을 만드는 데에 성공합니다. 유물론의 관점에서 보면 짝퉁이라 보일법한 관념론적 요소, 정신적 요소의 강조를 자신의 이름을 딴 사상의 주요 모토로 삼음으로써 사이비스러우면서도 이단아스러운 모습을 보이기도 했죠. 정치가로서 그는 자신의 무장투쟁에 충실한 정치가였습니다. 게릴라 전술을 중심으로 하여 결과적으로 중국을 정복하는 데에 성공했죠. 중일전쟁 때를 생각해본다면 후일 벌어질 공산당의 ‘공적 찬탈자’스러운 모습과 모택동의 ‘인민의 배신자’스러운 면모는 둘째치더라도, ‘우리는 물고기고 인민은 물이다. 적을 인민의 바다에 빠뜨려야 한다.’, ‘땅을 버리고 인재를 취한다면 둘 다 얻을 수 있지만, 땅을 취하고 인재를 버린다면 결국에는 둘 다 잃게 되는 법이다.’와 같은 게릴라 전술이 확실히 결과적으로 중국정복을 도운 것은 사실이었습니다. 한편으로 그는 타인을 자신의 악행에 동조하게끔 하면서 2인자들끼리 충성경쟁을 시키고 능력을 계속 입증해보이게 하는 방식으로 자신의 권력을 공고히 했습니다. 그와 동시에 수많은 인민을 죽음에 몰아넣은 학살자의 모습을 보이면서, 중국 격언 중 ‘말 위에서는 천하를 평정할 수는 있어도, 천하를 다스릴 수는 없다.’는 말을 몸소 보여준 인물이기도 합니다.
2. 역시 유전자의 힘이라는 게 있긴 있는갑네......
그럼 이 양반의 사생활에 대해 얘기해봅시다. 우선 사람이 살아가기 위해 가장 필요한 식생활적 면모부터 얘기해보죠. 뭔가 독재자하면 떠오르는 이미지나 사진상으로 보이는 그의 체격 등을 보면 산해진미만 골라 먹었을 것 같은 사람으로 보이는데, 의외로 그의 식생활을 매우 소박했습니다. 중국이 개혁개방을 한 이후 상업이 활성화되면서 지금도 모가채(毛家菜), 모가요리(毛家料理)라 하여 모택동이 즐겨먹었다는 식단을 재현해 파는 가게가 많은데, 잡곡밥에 4~5가지를 넘지 않는 해산물과 야채 위주의 반찬이 모택동이 주로 먹었던 식단이었습니다. 물론 연회나 행사 때에는 산해진미도 즐겼지만, 그때를 제외한다면 거의 소박한 식단을 유지했고 가끔씩 즐겨 먹은 홍소육이나 취두부도 중국 요리에서 그리 귀한 요리 취급은 안 하는 것을 감안한다면, 그의 식생활은 최고 권력자 치고는 매우 소박했습니다. 한가지 특징이 있다면, 그는 매운 요리를 자주 즐겼다는 것 정도일까요? 그는 실제로 고추요리나 풋고추 반찬, 고추만두를 즐겨 먹었는데, ‘고추는 혁명의 상징이다. 붉은 고추를 잘 먹는 자일수록 혁명을 향한 열기도 뜨거운 법이다’라고 할 정도였습니다. 그래서인지 중국인들 사이에서는 이런 농담이 돌더군요.
‘모 주석이 매운 요리를 좋아해서 문혁도 그리 맵게 한 건 아닐까?’라고요
한편으로 그의 평소 생활에 있어서는 흡연과 양치를 빼고 얘기할 수 없을 듯합니다. 그는 하루에 담배를 최대 80개비를 태운 자였습니다. 당시 담배가 대부분 필터 없는 양절담배였고 지금보다 더 독하다는 것을 감안한다면, 하루 3갑 반 정도를 태웠다는 건 거의 걸어다니는 굴뚝 수준으로 피웠다고밖에 볼 수 없을 듯합니다. 뭐, 당시에는 흡연의 유해성이 대중적으로 홍보-인지가 잘 안된 시기였기도 하고 무엇보다 본인이 그렇게 담배를 태우고도 80 넘게 한 걸 보면 아주 이해가 안 가는 건 아니면서도 ‘강골은 역시 강골이구나’라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하는 형태의 양치 대신 중국 농민들이 전통적으로 하던 고차 가글로 양치를 대신했는데, 그 덕에 그의 치아 건강 상태는 말년에 확실히 엉망이 되어버렸습니다. (이 글 말미에 좀 자세히 언급하도록 하죠.)
다만 이 점은 그가 마냥 무식해서라거나 비위생적이라기보다는 당시의 문화적 면을 고려할 필요가 있을 듯 합니다. 사실 당대의 중국이나 우리나라도 1960년대까지는 치약과 칫솔을 이용한 양치질이 보편화되지 않았거든요. 우리나라도 소금을 이용한 양치가 1960년대까지 보편적이었고, 1960년대 농촌운동 때 했던 주요 관제사업 중 하나가 바로 ‘칫솔과 치약을 이용한 양치질 보급’이었습니다. 우리 쪽의 소금 양치가 중국으로 치면 고차 가글이었고, 모택동은 어린 시절부터 해온 습관대로 80 평생을 해온 셈입니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세 살 버릇 여든까지 못 버린 셈이죠.
3. 이제는 말할 수 있다
다만 그의 성생활은 확실히 난장판 그 자체였습니다. 앞에서 언급한 두 요소는 그렇다 할 변명거리라도 있지, 이 성생활은 변명을 하기 매우 힘든 수준으로 그의 밤 생활은 찬란(?)했습니다. 그리고 그 부분을 가장 가까이에서 언급한 책이 바로 리지수(李志綏, 1919~1995)의 『모택동의 사생활』이었습니다.
저자 리지수(리즈수이)는 서부중국 유니온 대학에서 의학박사 학위를 취득한 후 의사로 생활하다가 중화인민공화국 성립 이후 시드니에서 북경으로 넘어왔고, 의사라는 엘리트로서 밑바닥 체험을 하다가 1954년부터 모택동의 주치의 생활을 합니다. 22년간 주치의로서 모택동의 최측근 생활을 하면서, 그는 핵심계층으로서 당 내부의 여러 모습과 모택동의 사생활을 실시간으로 목격합니다. 다시 중국으로 돌아왔을 당시에 영웅으로 생각한 모택동을 22년간 보면서, 그는 타락한 ‘공산귀족’들의 모습을 보았고 모에 대한 존경심도 무언가 형언이 안되는 복잡미묘한 존재가 되면서, 그는 모택동 사후인 1988년, 두 아들과 함께 미국으로 망명해 책을 쓰기 시작합니다. 그 책이 바로 『모택동의 사생활』이었습니다.
4. “난 이미 여자의 몸 안에서 씻고 있어.”/?!?!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모택동의 성생활은 난장판 내지는 그 이상의 무언가였습니다. 애초에 본인부터가 주변 사람들에게 자신은 40일 이상 성욕 못 참는다고 공공연히 떠들고 다니는 자였습니다.
그의 화려한 경력은 과거 장개석의 국민당에 쫓겨 장장 9,600km를 강행군한 대장정 이후부터 시작됩니다. 대장정 완료 이후 그는 26세의 여배우와 여성 작가들과의 외도를 자행합니다. 문제는 그게 상처(喪妻)한 이후도 아니고, 같이 대장정을 완수한 혁명 전우이자 아내인 하자진(賀子珍, 1909~1984)이 멀쩡히 살아있을 때의 일이었다는 겁니다. 당연한 결과였겠지만, 결국 그녀는 화가 머리끝까지 뻗쳐 모택동을 찾아가 이렇게 소리칩니다.
“이 돼지 자식아! 쓸모없는 호색한아! 하찮은 부르주아 계집과 동침하겠다고 여기까지 기어온 거냐? 당신이란 인간은 도대체 어떤 남편이고 도대체 공산주의자인거 맞냐?!”
당시 연안에서 모택동을 취재하고 있던 아그네스 스메들리는 이 상황을 다음과 같이 묘사했습니다.
‘초여름, 자정이 넘은 깊은 밤이었다. 릴리 우(우광웨이, 스메들리의 통역 겸 비서)의 동굴 방에는 여전히 등불이 켜져 있었는데, 모가 그쪽 문을 두드렸다. 조금 뒤 다급한 발소리와 함께 누군가가 릴리 우의 방문을 확 열었고, 여인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어둠을 갈랐다. "야, 이 개자식아! 네가 어떻게 나를 속이고 몰래 저 소자산 계급의 댄스홀 기녀 집으로 기어들 수 있어!" 하자진이었다. 나는 코트를 대충 걸쳐 입고 릴리 우의 방으로 달려갔다. 모의 부인이 악을 쓰면서 옆에 앉아 있는 모택동을 긴 손전등으로 마구 때리고 있었다. (...)’
이렇게 모의 불륜에 의해 둘은 이혼하고, 모는 훗날 사인방의 일원이 될 배우 출신의 강청(江靑,1914~1991)을 마누라로 맞아들이게 됩니다. 그러나 강청의 삐뚤어진 성격을 알고 난 후 모택동은 다시 그녀에 대한 애정이 식으면서 모의 바람기는 되살아나기 시작합니다.
중화인민공화국 성립 이후, 그를 막을 인물은 사실상 없어졌고 그는 대놓고 여색을 탐하기 시작합니다. 상해 보안당국이 그의 성욕을 채워줄 행동대 역할을 수행했고, 그걸 시행하는 것은 당중앙판공청 기밀사항국과 당중앙 경위단 문화공작대였습니다. 매일 이뤄지는 공연 속에서 모택동은 자신의 정력을 아낌없이 방사하기 시작했고, 본인의 취향을 맞춰달라고 적극적으로 주문을 넣기 시작합니다. 처음에 받았던 나이 좀 있고 세상 물정에 밝은 여자들 말고, 어리고 세상 경험이 적은 순박한 여자들을 달라고 요구를 했는데, 모택동은 죽는 순간까지도 처녀들과 잠자리를 가지면 건강해진다고 굳게 믿은 자였죠.
모의 사생활에서 새로운 여성을 끊임없이 공급해줄 채홍사 역할을 맡은 자들은 당의 주요 간부 중 하나였던 왕동흥(汪東興, 1916~2015)과 섭자홍(葉子龍, 1916~2003)이었습니다. 이들은 당의 통제망을 이용해 전국 각지의 어린 처녀들을 모택동에게 공급했고, 그 댓가로 타락한 공산귀족의 삶을 마음껏 누렸습니다. 당중앙 판공청 기밀비서실 주임이었던 섭자홍은 이런 더러운 일을 한 댓가로 국가의 창고에 있는 동독제 카메라, 일제 트랜지스터 라디오, 스위스제 시계 등 각종 사치품을 빼돌려 주머니를 채웠고, 1960~1962년의 대기근 중에 인민들이 기아로 떼죽음을 당하는 와중에도 고급 식량을 착복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왕동흥과 섭자홍마저도 “우리가 언제까지 이런 더러운 짓만 해야 하나?”하고 불만을 터뜨리는 지경까지, 모택동의 성생활은 날이 갈수록 엽기적으로 변해가기 시작했습니다. 나중에 가서는 ‘즐길 수만 있다면 그만 아닌가’라는 심정에서였는가 새로운 무언가를 즐기겠다는 심정에서였는가, 이제 그는 어린 미소년들과 유부녀까지 탐닉하기 시작합니다.
1961년 12월, 혁명 1세대의 딸이었던 한 육군 장교의 아내와 그 여자의 언니를 만났을 때, 모택동은 이들을 접견한 이후 장교만 집으로 돌려보냅니다. 그리고 그 사흘동안....... 예, 뒤는 상상에 맞기겠습니다. 상해 시장과 안휘 시장과의 선약도 취소해버리고 본인의 생활을 실컷 즐기는 이러한 행동 때문에 급기야 왕동흥은 이런 일하는 자신도 정말 아니었다 싶었는지, 불만을 터뜨리며 뒤에서 이런 말을 합니다.
“그 여자의 어머니가 살아있었다면, 주석께선 그 여자와도 했겠지!”
여기까지만 해도 문제가 보통 심각한 게 아닌데, 이 양반이 온 사방에 방사를 하고 다니면서 성병을 옮겼다는 게 문제였습니다. 그는 트리코모나스 질염을 몸에 갖고 다녔는데, 당시 중국에서 모택동의 위치가 위치이다보니 그와 관계를 한 이후 성병에 걸린 여성들이 그에게 옮은 병을 마치 훈장처럼 여기고 나중에 가서는 주석의 주치의였던 리지수에게 치료받는 것을 영광으로 여기는 막장스러운 지경까지 갑니다. 더 큰 문제는 이 트리코모나스의 특성인데, 이 병은 여성에겐 증상이 나타나지만, 80%의 남성들에게는 아무 증상이 안 나타나서 병의 증상이 나타난 여성뿐만 아니라 그 여성의 파트너도 같이 치료를 받아야 하는 병이라는 거죠.
결국 의사로서 도저히 두고 볼 수 없다고 본 우리의 리지수 씨, 모 주석을 찾아가 한마디 합니다. “주석, 이거 치료 안 하시면 다른 여자들에게 자꾸 옮을 겁니다! 약물치료가 다 끝날 때까지만이라도 좀 참으시죠.” 그러나 우리의 모 주석은 이 말을 하죠.
“내가 괜찮다면 신경 쓸 거 없어. 그런데 왜 자네는 그 일에 대해 신경을 쓰는 거지?
본디 의사들은 사물을 과장하는 경향이 있더구만.”
솔직히 진짜 이 인간은 남에 대한 최소한의 배려라는 게 없는건가 싶은 생각이 들 법한 발언을 들은 리지수 씨, “강청 동지한테도 옮을 수 있는데요?”라고 하니 모택동은 씩 웃으며 손을 저으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 사람하곤 이미 오래전부터 안 했어.”
그럼 아침마다 냉수욕하고 수영도 좋아해서 자주 하는 건 알겠는데, 좀 비누 가지고 몸을 자주 씻으라고 충고하니, 우리의 모 씨, 충격적인 발언을 날립니다.
“난 이미 여자의 몸 안에서 씻고 있으니 걱정말게.”
솔직히 예로부터 중국의 수도환경이 안 좋아서 중국인들이 자주 씻어봐야 개울에서 2주~2달에 한 번 씻는 게 전부였고, 그걸 감안한다면 모 씨가 아주 안 씻었다고 하기도 어폐가 있다지만...... 이런 발언을 면전에서 들으면.......
예상대로 리지수 씨는 이 말을 듣고 멘탈이 거의 박살나버립니다. ‘진짜 이 더러운 인간은 공감 능력을 담당하는 뇌세포가 세포자살이라도 일으킨 건가?’라는 생각이 들 수밖에 없는 상황에 직면한 리지수 씨, 자꾸 이딴 식으로 나오며 습관을 안 고친다면 계속 성병에 걸리는 여성은 나오고 악순환이 반복될 것은 자명했습니다. 결국 리지수는 의사로서의 사명감에 입각해 도저히 두고 볼 수 없다고 생각했고, 독단으로 모택동이 밤을 보내는 초대소의 관리인들에게 초대소의 침대 시트와 수건을 소독하라고 지시합니다. 하지만 처음에 제1조 당 간부들이 펄쩍 뜁니다. ‘어떻게 주석께 그런 불경한 짓을 저지를 수 있는가’라는 이유에서 말이죠.
도저히 두고 볼 수 없다는 결단 하에 거사를 감행한 리지수는 결국 사실을 까자고 결심합니다. 그래서 이러한 요지의 발언을 하죠. “동지들,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 잘 들으십시오. 지금 주석께서 성병에 걸리셨단 말입니다. 그리고 주석께서 생활 습관을 안 고치시면 악순환은 반복될 거고, 여기 초대소 같이 쓰는 동지들의 안해들한테까지 안 옮을 거라는 보장 역시 없소. 여기 소독하는 거 도저히 못 보겠거든, 개인 수건이라도 지참해서 사용하십시오. 성병 걸리면 어떻게 되는 줄 아십니까?” 요약하면 이겁니다.
“니들도 걸리고 싶나? 성병 걸리면 진짜 X돼! 의사로서 하는 말이다!”
그제서야 간부들도 사태의 심각성을 알고 주요 초대소의 침구와 수건을 모두 소독할 것을 지시하죠.(......)
5. 흙에서 태어났는데 흙으로 돌아가진 않았다
뭐 그의 개인적 면모는 이러했습니다만, 그런 그도 죽음을 피해 갈 순 없는 인간이었습니다. 나이와 병 앞에서는 그도 세상 무엇하나 무서울 것 없는 권력자에서 한낱 초원의 풀 한 포기가 될 뿐이었죠. 그렇게 1976년 6월이 되면서 운명의 시간이 다가왔습니다. 이때부터 모택동은 말을 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고, 리지수의 지휘하에 의사 16명과 간호사 25명으로 구성된 의료팀이 24시간 비상대기 근무체제에 돌입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정치국원 4명이 2명씩 교대로 모택동을 보필하기 시작하죠. 그 정치국원들은 온건파였던 화국봉(華國鋒, 1921~2008)과 왕동흥(汪東興, 1916~2015), 급진파이자 4인방의 일원이었던 왕홍문(王洪文, 1935~1992)과 장춘교(張春橋, 1917~2005)였습니다.
여기서 우리 한번 모택동의 죽기 전 몸 상태를 봅시다. 우선 앞서 언급한 적이 있었던 그의 치아 건강은 이미 망가진 지 오래였습니다. 치석에 플라그는 기본이었고, 흡연과 고차 가글 때문에 심각하게 진행된 치아 변색에 잇몸에 찬 고름은 서비스요, 거의 남지 않은 윗어금니는 부가가치세였습니다. 이 때문에 말년의 모택동 사진은 사진사들의 모의 이가 안 보이게끔 정교하게 각도를 맞춰가며 찍어야 했죠. 거기다 3갑 반을 매일 피운 결과 생긴 호흡기 질환이 따라옵니다. 폐기종, 폐렴, 기관지염에 더해 기흉까지 3군데 생겼는데, 이 때문에 숨을 들이쉬는 건 가능한데 내뱉는 게 안돼서 강제로 왼쪽 폐를 누르거나 미-중 외교 당시 키신저에게 선물 받은 미제 산소 호흡기가 필요한 지경이었습니다. 이뿐만 아니라 모택동은 흔히 ‘루게릭병’으로 알려진 근위축성측색경화증(현대 의학으로도 보통의 경우 5년 정도가 한계인데, 당시에는 이 병에 걸리면 길어야 1~2년 살고 죽는 병이었습니다)과 심근경색까지 걸린 상태였습니다. 한마디로 언제 숨이 끊어진다 해도 이상할 게 없는 상태였죠.
그렇게 1976년 9월 9일, 모택동은 숨을 한번 들이쉬고는 그대로 이 세상과 작별을 나눕니다. 수많은 죽음과 인민의 원혼, 그리고 세계를 뒤흔들었던 모택동주의이라는 공산주의 사상의 계파와 그 외의 온갖 복잡하면서도 추잡한 요소들을 남기고 말입니다.
그의 죽음 이후, 그는 죽지 않았습니다. 그가 죽음으로서 그가 갖고 있었던 온갖 요소들이 판도라의 상자 뚜껑을 연 것 마냥 튀어나왔기 때문이었죠. 모택동의 죽음 이후, 4인방의 리더격이자 모택동의 처 강청이 돌연 희번득거리는 눈빛을 비치더니 리지수에게 책임을 묻기 시작합니다. 그러면서 ‘왜 주석의 용태가 이리 될 때까지 보고를 안 했는가. 이건 모두 당신 책임이다.’라며 난리를 치기 시작합니다. ‘진짜 인생이 이리 꼬이는건가’ 싶었던 순간에 등장한 것은 화국봉과 왕동흥이었습니다. ‘타락한 공산귀족들과는 다른, 예의와 품위의 소유자였던’ 화국봉은 리지수가 최선을 다했음이 확실하다며 그를 변호했고, 강청의 난리치기에 모두 질려있었던 간부들 역시 그녀의 말을 무시합니다. 왕동흥 역시 그러했죠. 그는 중앙경위단장이자 판공청 주임, 전 국무원 공안부 부부장이었던 권력자였기에, 그리고 강청과 업무상 트러블이 없었던 날이 없었기에 그녀의 말을 무시할 수 있었고 또 무시해버렸습니다.
모택동 사후, 정치국 회의가 소집됩니다. 정치국 위원들에게 모택동 사후의 정치보다 더 중요한 것은 ‘당장 어떻게 장례식을 치를 것인가’였기 때문이었으니까요. 일단 장례식을 위해 시신을 2주간 보존해야 한다는 결정에 따라 리지수는 그의 다리 동맥에 포름알데히드 2방울을 주사합니다.
하지만 이렇게 끝나면 대륙일리가요. 북경 가보신 분들은 알겠지만 아직도 천안문광장 옆에는 모주석기념당이 있고, 아실 분들은 아시겠지만 그 안에는 모택동의 시신이 박제돼있습니다. 이 박제된 시신에 대한 이야기는 여기서 시작됩니다.
1956년 시신을 화장해달라며 화장동의서에 서명까지 한 모택동의 의사와 달리, 정치국은 모택동 사후 시신을 영구 보존할 것을 결정하고 리지수에게 이를 주문합니다. 당연히 의사로서 불가하다고 봤기에 리지수는 반대를 합니다. 그도 그럴 것이 당대 엠버밍(쉽게 말해서, 미라 만들기)의 최고기술을 가진 소련도 실패했던 것이었으니까요. 레닌 시신의 귀와 코 부분이 부패해 밀랍으로 대체했다던가 스탈린 시신의 콧수염 부분이 떨어져 버렸다는 일은 내부문건으로도 알고 있었던 바였기에, 이게 어떻게 가능하냐며 리지수는 처음에 반대합니다. 하지만 정치국은 자기들의 감정도 좀 배려해달라며 막무가내였고, 리지수 씨는 속이 타들어갑니다.
‘아니 도대체 안 되는 걸 안 된다고 하지, 그럼 뭐 어떻게 할까? 내가 의사지 무슨 마술사인 줄 아나?’라는 생각을 하며 중국의 과학이 발전하질 못했는데 어떻게 하냐고 열을 내던 도중, 군부 주요 인사였던 섭검영(葉劍英, 1897~1986) 원수가 조언을 합니다. “리 동무, 그럼 미술공예연구소 교원들과 한번 상의해보시죠. 그럼 뭐가 좀 나올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좀 말이 통하는 상대가 있구나 싶어서 미술공예연구소 교원들과 상의를 하던 우리의 불쌍한 리지수 씨는 그렇게 지금도 남아있는, 역사에 남을 존재를 만드는 작업에 착수합니다.
우선 첫 번째로 할 일은 작업에 적절한 실내온도 맞추기였습니다. 시체안치실에 와보니 온도가 26도여서 도대체 왜 이렇게 온도를 올린 거냐고 물으니, 가관인 답변이 돌아옵니다.
“강청 동지께서 늘 하던 대로 실내온도를 26도로 맞추라고 명령하셨습니다.”
리지수 씨는 그 말을 듣고 또 다시 혈압이 상승합니다. ‘도대체 이 여편네는 뭐 하는 일마다 도움이 안 되는 거냐. 얼어 죽을 뻔한 적이라도 있는 거야, 뭐야?’라는 생각이 들 법하기에 그는 상남자답게 당장 정치국으로 달려가 담판을 짓고 돌아옵니다. 그놈의 26도고 뭐고 다 X까고 실내온도 16도로 맞추는 거 허가받고 돌아온 거죠.
일단 이렇게 1단계를 클리어했으니, 다음으로 넘어가야죠. 우선 썩기 쉬운 내장과 각종 장기를 모두 제거한 뒤, 겉부분을 보존하는 작업을 해야하건만, 이 분야의 최고봉인 소련도 완벽하지 않았는데 소련보다 기술이 더 떨어지는 당시 중국의 입장에선 불가라는 결론밖에 안 나왔습니다. 그러던 중 작업팀에서 어떤 해외논문을 찾아냅니다. 그건 바로 속칭 ‘포름알데히드 절이기’였습니다. 주사로 포름알데히드 12~16L를 손끝 발끝까지 채워 넣는다는 방법이었는데, 사실상 방법이 이밖에 없었고 시간도 없었기에, 결국 이들은 도박을 감행합니다.
사실 이 과정에서도 다다익선인가 싶어 도박성 실험으로 포름알데히드 22L를 주사했다가, 그만 사체가 부풀어 오르면서 머리통이 축구공마냥 부풀어 오르고 온몸의 땀구멍에서 땀 흐르듯 포름알데히드가 흘러나오는 대형 사고가 벌어지는 바람에, 리지수는 또 한 번 X됐음을 직감하고 식겁해야만 했죠. 결국 이렇게 10년 같았던 몇일간의 작업은 완료가 됩니다. 그렇게 모택동이라는 한 인간은, 지금까지 박제가 되어있는 상태로 역사에 남게 됩니다.
근래 들어 읽었던 프랑크 디쾨터의 『독재자가 되는 법』이라거나 『모택동의 사생활』의 내용을 다시 떠올려보자면, 인간으로서의 독재자에 대해 한 번쯤 생각해보곤 합니다. 독재자들의 개인적 면모를 보면서 느끼는 것이지만, 정통성이라는 면에서 역설적이게도 한없이 나약한 존재이면서 아무것도 가진 것 없이 태어난 하나의 인간으로서의 독재자들의 면모를 생각하게 되더군요.
그러나 한편으로 그들의 죽음은 어쩔 수 없이 공적인 것이기에 그들이 죽음으로서 퍼지는 추악함이나 여러 복잡한 요소는 온 사방에 흩뿌려집니다. 그것이 정치적이건 경제적이건 사회문화적이건 뭐건 말입니다. 예컨대, (어디까지나 박정희 본인의 입장이겠지만) 1979년 박정희가 예상치 못한 죽음을 맞으면서 벌어졌던 정치계의 파란과 12.12 군사반란, 새로운 군부의 등장, 독재자의 죽음에 따른 사회적 충격과 시민사회에서의 충격, 민주화 세력에서의 무림-학림 논쟁의 시작과 이로 인해 일어난 사회구성체 논쟁의 전 학술계-사회인식 세계에서의 파급 등을 생각해보면 마냥 가십거리로 치부할 일은 아닌듯하다고 감히 말해봅니다.
모택동은 저서 『모순론』과 『모택동선집』의 내용을 압축해 자신의 생각을 더 강렬하게 인민에게 전달하고자 자신의 이름을 딴 『모택동어록』을 작성했고, 그 안에서 이 말을 합니다. ‘모든 인간은 죽으나 어떤 이의 죽음은 태산보다 무겁고, 어떤 이의 죽음은 새털보다 가볍기도 하다.’라고요. 원래 이 표현은 사마천의 『사기(史記)』에 실려있는, 이 사서를 쓴 이유에 관해 기술한 「태사공자서」에 실려있는 내용이었습니다만, 그 표현이 적용되는 것이 본인도 포함될 줄은 스스로 알았을까요?
그럼 오늘의 글은 이쯤에서 마무리해볼까 합니다. 오늘도 변변찮은 글을 읽어주시는 전우님들께 감사 인사를 올리며 저는 이만 물러가 보겠습니다. 그럼 이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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