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과거 이 블로그의 주인장 되는 사람이 현역으로 군복무하던 시절, 인트라넷 카페 <휴머니스트>에 작성한 글을 복원한 것이다. 다만, 당시 글을 쓸 때는 지금처럼 인터넷에 마음대로 접근할 수 없어 머릿속에서 생각한 것과 기억에 의존해 글을 쓰다 보니, 사실관계가 맞지 않거나 숫자에서 오류가 있어 이러한 부분은 수정하였고, 다시 글을 읽으면서 발견한 비문과 논리구조 상의 오류 역시 고쳐 이 블로그에 올린다.
당시 내가 쓴 글에 관심을 갖고 읽어준 모든 이들에게 감사함을 담아, 그 당시 나와 함께 동고동락한 동기들을 생각하며 이 글을 다시 백업한다.
전우님들, 안녕하십니까. 여전히 국방부시계가 안 멈춘 어느 평범한 군사경찰입니다. 이제 제가 이 글을 쓸 수 있는 날이 거의 남지 않았음을 깨달았을 때가 되어, 앞으로 남은 기간 동안 마지막으로 뭔 주제로 글을 쓰고 가야 하나 생각을 해봤습니다. 그 결과, 지금은 조기출타로 하의도망을 친 제 동기가 예전에 써달라고 했던 소재를 떠올리며 이제 마지막이 될 글을 써볼까 합니다.
사실 안 쓰냐고 욕 먹었다던 주제가 이번 글의 주제이기도 합니다.(...) 근데 솔직히 제가 출입통제병이다보니 쓸 수 있는 여건이 잘 안 나오는 것을 시간 쪼개가며 쓰는 거라, 지통실에서 꿀 빨다 간거 본인도 인정하는 제 동기 놈의 조르기를 생각하면, 참 말이 나오려다가도 안 나오더군요. 다만 그렇다 해도 저도 지은 죄가 있는 것이, 그 조르기를 당하고 거진 반년만에야 이 글을 쓰고 있기 때문이죠. (미안하다 임마...)
최근에 제 학교 동기가 밈을 하나 보내더군요. 민음사에서 『풍요의 바다』 시리즈의 첫 소설인 『봄눈』 번역본이 나온 것을 홍보하려고 만든 밈이었는데, 다음과 같은 내용이 적혀있었습니다.
봄눈이 나온다고?
이럴 줄 알았다면 할복은 안 하는 건데!
왜 뜬금없이 밈 타령인고하니, 이 밈의 주인공이 제가 이번에 쓰려는 주제의 주인공이기도 하기 때문이죠. 일본 문학에 조예가 깊은 전우님들은 눈치채셨을 수도 있을 겁니다. 이번 글의 주제는 바로 유작 중 하나로 『봄눈』을 남긴, 우리나라에서는 주로 그의 독특한 사상으로 인식되는 작가, 미시마 유키오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마지막 글이 될 오늘의 내용을 시작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1. 상류층 라이프 그 자체의 아이
미시마 유키오(三島由紀夫, 1925.1.14.-1970.11.25.). 일본의 소설가이자 극작가, 사상가, 극우계열 정치논객이자 우리나라에는 그의 독특한 극우사상과 최후의 할복소동으로 잘 알려진 인물입니다. 그의 인생과 독특한 사상 등을 보자면, 그는 상당한 흥미를 끌어내는 인물이라 볼 수 있을 겁니다. 그럼 우선 미시마의 일생에 대해 얘기해보도록 합시다.
모든 작가들이 다 그렇지도 않고, 작가들의 작품세계 스펙트럼만큼 다양한 것이 작가들의 주변환경과 출신입니다만, 미시마의 집안은 작가로서건 일반인으로서건 뭐건 어느 누구의 기준으로 봐도 엄청난 상류층이었습니다. 현실권력의 측면에서 봤을 때, 미시마, 아니 히라오카 키미타케(平岡公威)의 집안은 고위공무원에 귀족집안이라는 어마무시한 집안 내력을 가지고 있었죠. 그럼 잠깐 키미타케의 집안내력을 보도록 합시다.
① 조부 하리오카 사다타로
-동경제국대학 법학부 출신. 고등문관시험 합격 이후 관료의 삶을 시작.
-후쿠시마현 지사, 화태청(지금의 사할린 지역을 관할한 행정청) 장관까지 역임
② 조모 나가이 나츠
-대심원판사(대법원판사에 상응)인 부친과 아나호번 번주(도쿠가와 막부와 관계가 깊은 가문이었음)의 서녀인 모친 사이에서 출생
③ 부친 히라오카 아즈사
-개성중학교(開成中學校)졸업. 이때의 인연으로 시즈에와 결혼.
-구제 제1고등학교(지금의 동경대학 교양학부)와 동경제국대학 졸업.
-고등문관시험에 합격해 농림성 수산국장 역임.
④ 모친 하시 시즈에
-한학자이자 개성중학교 교장 하시 겐조의 2녀.
-문학적 재능이 탁월했다고 알려짐.
이런 어마어마한 집안에서 태어난 히라오카 키마타케는 뭐랄까, 이런 집안 하면 흔히 떠오를법한 ‘상류층 집안의 도련님’스러운 삶을 어렸을 때부터 보냅니다. 생후 49일 만에 어머니의 품에서 떨어져 할머니 나츠의 과보호 속에서 자랐는데, 키미타케는 이 당시 정말 온실 속의 화초 그 자체의 삶을 보냈습니다. 어머니 시즈에가 그에게 모유 수유를 할 때에도 정해진 시간에만 그를 안을 수 있었고, 나츠는 손자가 소란스럽게 뛰어놀거나 그 나이대에 흔히 갖고 놀 법한 장난감을 갖고 노는 것 역시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또래 아이들과 같이 노는 것 역시 허락하지 않았고, 나츠가 지정해 준 이웃집 여자아이와 소꿉놀이를 하는 것과 혼자 있는 것은 허락되었죠. 그리고 키미타케는 할머니의 지도 아래 귀족문화를 배우며 자라게 됩니다. 이러한 삶은 그가 학습원(學習院)' 중등과 진학을 하던 12세가 되어서야 끝났고, 12세가 되던 때에 그는 드디어 어머니의 품으로 돌아오게 됩니다. 그 때문이었을까, 미시마는 그의 문학작품에서 모친고착적 성격을 강하게 띤다는 평을 받곤 합니다.
': 學習院. 지금도 일본 황족과 구 화족 출신 등 상류층 자제들을 교육하는 것으로 유명한 고등교육기관입니다.
할머니의 과보호를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라면 운동장 조례가 있을 겁니다. 이 사례의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원래도 몸이 약했던 키미타케는 운동장에서 아침조회를 하던 중 몇 번 쓰러진 경력이 있었는데, 당시 의사가 “웬만하면 직사광선을 피하세요.”라고 진단을 했습니다. 그러자 나츠는 학교로 직접 가서 교장의 면전에서 다음과 같이 강력하게 요구했죠. “앞으로 우리 키미타케에게 햇빛을 쫴야 하는 아침 운동장 조회 같은 건 절대 시키지 말아 주십시오.”라고요. 그 결과, 안 그래도 집안 후광 덕에 교장부터 일반 평교사들까지 학교의 모든 교사들에게 집중케어를 받던 키미타케는 ‘신의 아들’마냥 모든 운동장 조회를 합법적으로 다 째버릴 수 있는 특권을 누리게 됩니다.
사실 키미타케가 태어났을 무렵부터 그의 집안은 가세가 기울기 시작했기에 그가 부와 권력을 모두 겸비한 금수저라 하기는 힘들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학습원에서 공부하던 타 귀족 자제들과 비교해서 그런 거지 당시로서나 지금이나 귀족의 피가 섞인 고급관료 집안 자제라는 것을 무시할 수 없는 내력이었죠. 그 덕에 그는 귀족문화와 국내외 여러 문학을 접할 기회를 얻었습니다. 할머니의 과보호 아래 있던, 혼자 보내는 시간이 많았던 어린 시절부터 그는 오스카 와일드와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작품, 일본 고전문학을 있는 대로 읽기 시작했고, 그는 할머니의 권유로 진학한 학습원에서 재학 당시 문학 편집부 최연소 회원이라는 타이틀을 거머쥐게 됩니다. 실제로 그는 성적이 매우 뛰어났는데, 그는 졸업 당시 전교 1등의 권한이었던 졸업연사 자격과 학습원 수석졸업자의 영예였던 금시계, 천황으로부터 하사 받는 금시계를 차지하게 됩니다. 그리고 집안 내력 그대로 ‘동경제국대학 법학부 졸업-고등문관시험 합격’ 테크를 타게 되죠. 이제는 이것도 과거의 표현이지만, 우리 식으로 비유하자면 ‘서울대 법대 졸업-사법고시와 행정고시 동시 합격’이라는 엄청난 위치를 보장하는 고등문관시험에 합격했으니 세속적 관점에서 보면 남부러울 것 없는 인생이 시작될 예정이었지만....... 키미타케는....... 관료로서의 화려한 경력보다는 문학에 더 애착을 갖기 시작합니다.
뭐 자식이 현실적으로 편하게 살길 바라는 거야 모든 부모의 마음이지만, 문제는 도가 지나치면 자식의 꿈을 밟아버릴 수도 있다는 것이겠죠. 아니나 다를까, 키미타케의 아버지인 히라오카 아즈사는 아들의 방에 들어와 아들이 써놓은 원고를 무자비하게 찢어놓는가 하면 아들에게 독일법을 공부할 것을 강요하기도 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클리셰마냥 등장하는 것은 바로 어머니의 위로와 사랑이었죠. 시즈에는 아버지에 의해 찢긴 그의 희망을 보듬어주며 키미타케가 문학적으로 성공할 거라고 격려해 줬고,, 어머니의 지지 덕에 키미타케, 아니 미시마 유키오는 대학생 신분으로 여려 단편소설을 잡지에 출판하며 여러 문학인들과 교류합니다.
그러나 전쟁이 끝나면서 그의 인생에 시련이 찾아옵니다. 안 그래도 국가 사정이 개판 그 자체였던 전중(戰中) 일본이었기에 고위관료들에게조차 임금체납을 시전하던 게 일상이었는데, 일본이 패망한 후 GHQ의 공직추방령에 의해 ‘재벌해체, 제국시절 고위관료의 공직추방, 육해군의 해체와 장교 전원추방’이라는 3 연타를 맞음으로써 집안 사정이 안 좋아지면서, 결국 키미타케는 1947년 대학 졸업 후 집안의 요구로 취업전선에 뛰어들게 됩니다. 유명은행 2곳에 취업하려다가 면접에서 떨어지고, 아버지의 요구로 그는 고등문관시험을 쳐 대장성(우리의 기획재정부에 상응) 고등관리직을 얻게 됩니다. 사실 이 당시에 그는 시험 준비와 문학을 병행하던 중이었는데, 이 점을 고려하면 그의 문학에 대한 열정 하나는 인정해야 할 겁니다. 그리고 그의 엄청난 재능과 실력 역시 말입니다. 우리로 치면 5급 사무관을 뽑는 고시 그 이상의 존재였던 고등문관시험이 몇 달 공부한다고 해서 붙을 수 있는 시험이 절대 아니라는 걸 감안한다면 말이죠.
하지만 원래도 병약했던 몸으로 ‘리얼 멀티태스킹 라이프’를 살던 그는 출근 중 역에서 과로로 실신해 선로로 떨어져 죽을 뻔한 경험을 합니다. 다행히 열차가 오기 훨씬 전에 벌어진 일이라 도로 정신이 들어 열차가 오기 전에 플랫폼으로 기어 올라왔지만, 일이 이 지경까지 가자 결국 미시마가 글을 투고하던 출판사까지 찾아가 “아니, 당신들 우리 아들이 글 좀 쓴다고 기생처럼 귀여워하는 거 아니요? 그 아이가 나중에 시이나 린조(椎名麟三, 1911.10.1.~1973.3.28., 소설가 겸 극작가, 미군정기 일본의 영적 빈곤을 중심으로 창작.)라도 될 줄 아오?”라고 성질을 내던 아즈사는 이 이상 하다간 아들 잡겠다 싶어서였는지 아들이 공무원을 그만두는 것을 허락합니다. 그렇게 청년 히라오카 키미타케, 아니 미시마 유키오는 10개월간의 공무원 생활을 뒤로하고 1949년, 『꽃이 만발한 숲』 등을 쓰던 습작 문학생에서 『도적』, 『가면의 고백』으로 문단에 데뷔한 전후(戰後) 2세대 신인 전업작가가 됩니다. 무려 카와바타 야스나리(川端康成, 1899-1972)의 추천을 받아서 말이죠.
2. 순수한 예술과 할복의 미학?
그렇게 20대의 나이에 문학계에 데뷔한 미시마 유키오는 그 어렵다는 문학성과 대중성을 모두 휘어잡은 최고스타이자 일류작가로 떠오르게 됩니다. 드라마에서나 가능할법한 일을 정말 현실에서 달성한 셈이죠. 아닌 게 아니라, 그는 일본에서 유명 문학상을 여러 차례 수여받았는데, 그것은 모두 그가 2-30대의 젊은 시절의 일이었습니다. 소설 『파도소리』와 『금각사』로 그는 1954년과 1957년에 각각 신조사 문학상과 요미우리 문학상을 타게 되었죠.
전후문학세대로 떠오른 시대의 총아로서 정력적으로 활동했고, 그 결과 대중에게도 유명인으로 각인된 작가가 되었으며, 유럽과 미국에서도 그의 작품이 번역되면서 외국 독자층 역시 확보하게 되면서 외국문학인들과도 교류를 하는 등, 미시마는 당대의 라이징스타 그 자체의 인생을 살게 됩니다. 1963~65년에는 불과 30대의 나이에 노벨문학상 후보로까지 거론되었죠.
그의 명성을 드높인 『금각사』, 『가면의 고백』, 『파도소리』 등 탐미주의적 작품은 세계문학계에서도 주목받는 작품이 되었으며, 언어와 민족을 초월하여 인간의 감정을 담백하면서도 명확히 표현할 수 있는 작가가 그리 많지 않다는 평이 나올 만큼, 그는 탐미주의라는 영역에서 독보적인 재능을 보였고 1950-60년대 일본 문학을 대표하는 명필이었습니다. 한편으로 그는 자신만의 독특한 천황제 이데올로기 하에서 국수주의적면서 극우 색채를 띈 소설 역시 쓰기 시작합니다. 탐미주의적인 키미타케 시절의 모습을 창조적으로 파괴하고, 육체미와 할복의 미학을 찬양하는 미시마가 되어 돌아온 키미타케는 2.26 사건을 배경으로 하는 『우국』, 천황제를 향한 낭만적 모습을 표현한 『영령의 소리』를 씁니다.
3. ×××: 우리 일본이 이래서야 되겠는가!
이렇게 일본문학사에서 손에 꼽힐 만큼의 실력과 재능을 보유한 그는, 한편으로는 정치논객이자 사상가로서의 삶 역시 보냅니다. 그는 『우국』, 『영령의 소리』를 발표하던 시기부터 인간 내면에 집중한 탐미주의에서 벗어나 확고한 ‘천황주의자’이자 정치적 작가로서의 변신을 시도합니다. 이때 만들어진 조직이 바로 방패회(盾の會, 타테노카이)였습니다.
1966년, 우익계열 대학생들과의 면담을 한 미시마는 1967년에 자위대 체험 입대를 완수했고, 그 결과 ‘좌익의 간접침략으로부터 일본을 보호해야 한다’는 이유를 내세워 1968년 10월 5일, 방패회 결성을 선언합니다. 방패회는 ‘명백한 천황제 부활, 반공, 필요시 폭력 불사’를 강령으로 하여 자위대에서 매년 1개월씩 군사훈련을 받고 일본군과 유사하게 10명을 1반으로 하여 총 10개 반, 정원 100명으로 구성된 일종의 사병조직이었습니다. 회원들은 명문대 재학생과 졸업생을 대상으로 하여 미시마가 직접 면접을 통해 선발했고, 운영경비 역시 대부분 미시마가 충당했습니다. 방패회 휘장과 제복, 단가(團歌) 「起て!紅の若き獅子達(일어서라! 붉고 젊은 사자들아)」 역시 미시마의 작품이었습니다. 동시에 그는 평화헌법에 대한 문제를 제기하며 방패회 내부 조직으로서 헌법연구회를 발족하여, 1971년 2월에 원고지 200매 분량의 유신헌법을 기획하기도 합니다.
한편으로 그는 「문화방위론」(1968)에서 자신만의 독특한 극우 사상을 피력합니다. 그는 무질서하리만큼 자유로원던 일본문화의 정신을 언급하면서 미학의 총람자(總攬者)로서 일본문화에 질서를 부여할 존재로서 천황을 선택합니다. 그러한 역할을 맡은 천황은 일본문화를 물질문명의 오염에서 구하고 공산주의로부터 일본을 수호할 의무를 갖게 된다는 것이 그의 논지였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무력이 필요하고 이는 현행 헌법에서도 실현할 수 있다고 그는 주장했었죠. 그가 직접 자위대에서 공수 훈련을 포함한 군사훈련 체험을 한 것, F-104 스타파이터 시승과 같은 기행을 벌인 것, 방패회를 결성한 이유 역시 여기에 있었던 셈이었습니다.
잘 안 알려져 있지만, 당시 미시마는 일본에서 국군의 필요성을 제기하며 자위대 청년 장교단, 정부 신진관료들과 어울리면서 한국을 방문해 휴전선과 무장간첩 침투루트를 탐방하기도 했고, 예비군의 무장간첩 수색작전을 직접 참관하기도 했습니다.''
'': 사실 당시 한국의 ‘보수’와 일본의 우익은 그 목적과 존재의의에 있어 반공이라는 공통분모가 컸기에, 이들 사이에서 음지에서의 교류가 있었던 것 역시 사실입니다. 실제로 1960-70년대 일본의 주요 우익세력은 당시 한국군의 협조를 받아 권총 사격훈련을 받거나 새마을 운동에도 일부가 비공식적으로 참가하곤 했습니다.
그의 사상관을 보여주는 행보 중 가장 유명한 것은 바로 1960-70년대에 일본을 관통한 전공투(全學共鬪會議)와의 2시간가량의 대담입니다. 1969년 5월 13일, 동경대 야스다 강당에서 미시마는 동경대 전공투 1000여 명 속에서 전공투 패널 4명, 청중 4명을 실질적 발언자로 하여 2시간 동안의 토론을 진행합니다. ‘극좌였던 전공투와 극우였던 미시마의 만남’이라는 이미지에서 오는 험악한 분위기가 전개될 거라는 예상과 달리, 실제 모습은 유쾌하고 우호적인 분위기에서 진행됐습니다. 당시 이들은 철학, 사학의 전반적 면에 대해 논하면서 자아와 육체, 시간과 공간, 역사적 존재로서의 천황의 모습 등을 언급하며 서로를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이려 설득하는 것에 더 가까운 모습을 보였습니다. 일단 그들이 서로 우호적인 분위기를 형성하는 게 어떻게 가능했는지 보도록 합시다. 우선 미시마와 전공투는 다음의 공통분모를 보유하고 있었습니다.
1. 기성체제에 대한 염증과 분노
2. 기존체제 타도와 변혁을 위한 폭력사용의 일부 불가피함을 인정
그러나 서로를 인정하면서도 결론은 나지 않았는데, 그 이유는 다음 때문이었습니다.
미시마: ‘민족적 자존심이 우선시 되어야 한다. 외세는 믿을 게 못 된다.’
전공투: ‘국제사회의 혁명연대는 믿을 수 있고, 또 믿어야 한다.’
그리고 여기서 위 요소의 일부로 해석 가능한 ‘천황제의 인정 여부’가 둘 사이에서 갈립니다. 미시마는 ‘계급타파의 조건으로 전공투가 믿는 절대적 요소에 천황이라는 이름을 붙여도 무방하지 않은가’라고 했고, 전공투는 이를 ‘그건 명백한 궤변이기에 받아들일 수 없다’고 하면서, 결과적으로 이들의 토론은 결과를 내지 못합니다. 다만 이와는 별개로 미시마는 자신의 후배들과 토론을 하면서 그들의 깊은 사고와 지식에 좋은 인상을 받았고, 후일 방패회 측근에게 당시 전공투에 대해 좋은 평을 내렸다고 합니다.
그런데 한 가지 아이러니가 있다면, 미시마는 군대를 안 갔다는 겁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는 원래 태평양전쟁 말기에 징집 대상으로 분류되어 신검을 받았는데, 당시 군의관이 청진 과정에서 그의 폐에서 뭔가 이상한 소리가 나는 것을 느끼고 몇 가지 문진 이후 결핵이라고 판단해, 그를 소집제외대상으로 분류해 돌려보낸 것이었죠.
문제는 그게 사실 군의관의 오진이었다는 겁니다.
집안의 ‘빽’을 이용해 현역소집대상에서 제외시켰다는 설도 있는데, 여하튼 그가 속칭 ‘신의 아들’이 된 것은 사실입니다.
4. 자위대 제군들, 궐기하라! /이거 완전히 돌은 놈 아니야?!
이렇게 여러 방면에서 왕성한 활동을 하던 미시마 유키오, 자신의 최종 목표실현을 위해 1970년 11월 25일, 이치가야에 있는 자위대 동부방면군 사령부를 찾아갑니다. ‘우수 자위대원 표창’을 명목으로 그는 사전에 엄선한 방패회 회원 4명과 함께 사령부로 들어옵니다. 총감과 휘하 간부들 역시 그들과 면식이 있었기에 그를 반갑게 맞았죠. 하지만 그때까진 몰랐습니다.
이들이 한순간에 거수자, 괴람이로 돌변하게 될 줄은 말입니다.
한순간에 괴람이가 된 미시마 일행은 마츠다 켄리(益田兼利) 동부방면군 총감을 포박해 인질로 잡은 뒤, 연설을 위해 전 자위대원들을 집결시킬 것을 요구합니다. 그렇게 출입통제와 기지경계의 중요성(?)을 일깨워주며 동부방면군 사령부에 비상이 걸립니다. 마침 점심시간에 일이 벌어졌기에, 전 대원들은 밥 먹다 말고 비상집결 사이렌 소리에 뛰쳐나오고, 근무 뛰던 대원들을 근무 중 날벼락 맞고 ‘인생...’ 거리며 무장을 전환한 뒤 저지선을 형성합니다. 그렇게 벌어진 요상한 상황 하에, ‘훈련상황’이 ‘상황’으로 변하면서 자위대원들 사이에선 일대의 긴장이 흐릅니다.
잠시 뒤, 칠생보국(七生報國)이라는 문구를 새긴 하치마키를 머리에 두른 미시마 유키오가 사령부 발코니로 나옵니다. 그는 중대장 메타를 타며 운을 띄웁니다. “자위대 제군들, 나는 여러분에게 실망했다!”라고 외치며, 일본을 지키기 위해 국군이 필요하고 이를 위해서는 자위대가 궐기해야 함을 강조하는 연설을 합니다. 미시마는 미일안보조약의 개정, 헌법개정, 천황을 위한 자위대의 친위쿠데타를 골자로 한 연설을 시작했고, 이 연설을 들은 자위대원들은.......
호응을 할 리가요. 오히려 욕을 퍼부었습니다. 사실 당시 음향시설이 조악해서 소리부터 잘 안 들리던 데다 헬기 소리와 웅성대는 소리 때문에, 도저히 고쳐질 기미가 안 보였던 과거 우리 기지 방송 구형 엠프마냥 그의 말을 알아먹기 힘들었던 게 제일 컸습니다만......
내용을 들었다 해도 당시 상황상 호응을 해줄 리가 없었습니다. 이미 미시마 일당이 거수자로 돌변해 난동을 부리며 휘두른 칼에 맞아 중상을 입은 대원까지 나온 상황이었고, 무엇보다도 오전 일과 끝내고 밥 먹으면서 커피도 한 캔 까고 담배 한 대 하고 올 생각이었는데, 느닷없이 웬 희한한 놈이 나타나 총감을 인질로 잡고 헛소리를 하면 호응을 해 줄 리가요. 웅성대는 소리 너머로 자위대원들의 썩은 표정과 함께 들리는 말은 “왜 작가가 공무원 일에 끼어들어 이 소란을 피우냐?”, “머리 좀 식이쇼!”, “왜 밥 먹고 있는데 이 난리를 피워 사람을 끌어내냐?”, “무사라는 놈이 비겁하게 인질극을 벌이냐? 그러고도 무사더냐!”, “이거 완전 미친놈 아냐?!” 등 비난과 야유였고, 결국 30분으로 예정했던 연설은 7분 만에 종료되었습니다. 그 7분 중에서도 약 2할은 미시마가 자위대원들에게 조용히 하라고 호통치는 내용이었죠.
그렇게 비난과 야유 속에서 ‘천황폐하 만세’를 3번 외치고 들어온 미시마는 자신의 말과 행동이 하나로 수렴한다 여긴 원칙, 즉 죽음을 택합니다. 『우국』에서 타케야마가 최후를 맞은 방식 그대로, 타케야마의 죽음 과정을 예찬하던 것과 같이, 그는 그가 예찬해 온 방식으로 칼을 빼들고 상의를 벗은 뒤 그의 배에 칼을 찔러 넣었습니다. ‘칼날이 배를 가르는 순간, 둥글고 환한 태양이 감기는 그의 눈꺼풀 뒤에서 솟아올라 찬란히 하늘을 물들였’을 거라고 본인은 생각했을지 모르겠습니다. 일단 본인은 할복자살한 사람치고는 비교적 평안한 표정으로 죽음을 맞았습니다만, 현장은 별개였습니다. 미사마의 뒤를 쳐주고 자신도 자살한 카이샤쿠 역할을 맡은 모리타 마사카츠의 시신 옆에는 머리와 몸뚱아리가 분리되고 장기자랑(...)이 펼쳐진 미시마의 시신이 온 사방에 피를 뿌린, 말 그대로 지옥도 난장판이었으니까요.
사실 미사마 본인부터가 원래 계획대로는 배를 가른 후에 혈서로 유서까지 쓰려고 했으나 공통 때문에 포기했고, 후에 경시청의 부검 결과 그는 내장을 꺼낸 후 고통을 참으려 혀를 깨물었다고 합니다. 그렇게 똘끼 충만한 천재는 유례를 찾기 힘든 자극적 방식으로 최후를 맞이하면서, ‘아주 미친놈’으로’ 제대로 각인이 됩니다. 그의 죽음 이후 방패회는 해산했고, 남은 회원들은 지급받은 방패회 제복을 그의 아내에게 반납합니다. 그리고 어느 기묘한 사내는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되었죠.
워낙 파격적인 천재이다 보니 서양에서도 그의 일생에 대해 많이 언급하곤 합니다. 대표적으로 그의 전기 영화라 할 수 있는 폴 슈레더 감독의 『MISHIMA: a life in four chapter』가 있죠. 미시마라는 인물에 대해 대략적으로 간단히 보고 싶으신 분은 보면 좋을 듯한 영화인데, 이 영화는 미시마의 할복 사건과 그의 일생을 교차시키며 전개하는 방식으로 진행됩니다. 영화는 현재의 미시마 할복사건의 흐름과 미시마의 대표작에서 따온 각 챕터는 칼라로, 그의 인생은 흑백으로 교차시켜 보여주면서 그의 인생과 그의 작품관을 보여주는데''', 전체적인 그의 인생과 작품관의 느낌을 읽기에는 무리가 없을 것입니다. 아, 참고로 이 영화 보실 때는 약간의 노출은 감안하고 보셔야 합니다. 그리고 덤으로 미시마 역할을 맡은 배우와 실제 인물이 그닥 닮지는 않았다는 것도요?
''': 1. 미(美): 금각사, 2. 예술: 쿄코의 집, 3. 행위: 달리는 말, 4. 붓과 검의 조화
5. 단순한 미치광이... 였을까?...였을까?
우리나라에서는 그의 이미지가 ‘정신 나간 미친 극우 놈’으로 박혀버리는 바람에 근래 이전까지 『파도소리』, 『가면의 고백』, 『금각사』 외에는 그의 작품이 한국에 정식으로 소개된 바 역시 없었고, 일본에서도 한때는 정계에서 그의 이름을 꺼내는 것이 거의 금기시될 정도였습니다. 시인 김지하는 그의 죽음에 관한 소식을 듣고 「아주까리 神風-三島由紀夫에게」라는 풍자시를 지었었죠. 대하소설 『토지』의 저자 박경리는 더 신랄한 비난을 했는데, 그녀는 미시마의 행동을 ‘얄팍한 로맨티시즘에 한계에 도달하면 결국 죽을 수밖에 없는 일본적 미학의 얄팍함의 표상’이라고 사정없이 깐 바가 있습니다.
다만 그의 죽음, 더 나아가 그의 사상은 생각 이상으로 복잡하기에 도매급으로 단정해 말하기 힘든 것 역시 사실입니다. 이번에는 그 점에 관해, 삼도를 위한 변명을 해볼까 합니다.
그가 할복을 한 이유는 표면적으로는 평화헌법에 대한 반감과 자신의 뜻에 야유를 보낸 자위대에 실망한 것입니다만, 또 다른 해석 역시 존재합니다. 그것은 바로 그가 ‘늙는 것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라는 해석과 ‘죽음에 대한 환상’ 때문이라는 해석입니다.
우선 일반적으로 알려진 그의 할복 이유는 바로 천황을 위해 죽지 못했다는 것에 대한 후회의 감정이 그의 죽음을 앞당기는 방아쇠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군의관의 오진이었건 집안 빽을 써서였건, 결국 소집 제외대상이 되어 천황을 위해 죽지 못했다는 것이 그에게 있어서는 전후에 갖게 된 일종의 원죄와 같이 남았다는 것이죠. 그러나 한편으로 더 깊은 곳에는 그가 가진 노화에 대한 두려움이 있었기에, 그가 비교적 젊은 40대 중반에 그런 자극적인 죽음을 택한 것이라는 평가도 있습니다. 그는 실제로 “내가 나가이 카후(1879.12.3.~1959.4.30. 일본의 관능주의-탐미주의 소설가)처럼 늙는다는 것은 상상하지도 못하겠다.”라고 말한 바가 있었고, 앞서 언급한 영화 『MISHIMA: a life in four chapter』에서도 이 부분을 의식한 미시마의 독백 장면이 나옵니다.
“언어는 속이는 법이나 행동은 속이는 법이 없다. 붓과 검의 조화가 바로 무사의 신조이고 생활이었다. 이제는 잊혀진 이 조화가 예술과 행위로 결합 가능한가? 그 조화는 섬광에서만 일어난다. (...) 나이 40에 이르면 아름다운 죽음은 없다. 발버둥 친다 한들 추레하게 늙어가고 억지로 살아가는 것이다.”
또 다른 해석으로는 죽음에 대한 환상 때문이라는 해석도 있는데, 이는 『가면의 고백』을 근거로 하는 평론가들의 의견입니다. 미시마의 자전소설로 평가받는 『가면의 고백』에 나오는 어린 시절 할머니로부터 받은 영향이'''' 바로 그것이라고 보는 견해인데, 어떻게 보면 그가 택한 형태의 죽음이 ‘지배층에게만 허락된 형태의 죽음’이라는 점을 생각해 본다면 그의 할복예찬은 마냥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은 아닐 것이라 봅니다.
'''': 할머니인 나가이 나츠에게서 배운 지배층의 사고방식과 귀족문화 등
6. 예술지상주의와 헬창의 사이에서
완벽한 미의 추구를 갈망한 탐미주의적 작가로서의 히라오카 키미타케건, 희한한 우익사상에 기반한 정치적 작가로서의 미시마 유키오건, 이 두 명의 미시마의 공통점이라면 뛰어난 문학적 능력입니다.
그의 사상적 면을 차치하더라도 그의 문학적 재능이 정말 뛰어나다는 것은 사실이죠. 정치적 활동만으로 유명세를 얻어 돈 버는 작가였다면 감히 이름도 올릴 수 없는 노벨문학상 후보로 거론될 정도의 인물이라는 점을 생각한다면 말입니다. 『사랑의 갈증』, 『금지된 색』, 『파도소리』를 쓸 당시의 미시마는 미를 찾기 위해 인간의 내면 그 자체를 파고들었습니다. 권력이나 집단은 인간의 섬세한 가치를 단순화해 훼손한다고 여겼었죠. 전후세대의 허무주의와 이상심리를 완벽한 미를 추구하는 관점에서 표현해 가던 그는, 최종적으로 자신의 미학관의 정수라 평가받는 『금각사』에서 예술지상주의자로서의 탐미주의적 모습을 보여줍니다.
말더듬이에다 추하게 생긴 사미승인 주인공 미조구치는 ‘세계를 변모시키는 것은 안식’이라는 친구의 말에 반박하며 ‘세계를 변모시키는 것은 행위’라 하며 절대적 미를 추구하기 시작합니다. 그 과정에서 미시마는 관념 속에서 미를 재구성하고 아이러니의 미학을 표현하며 그것을 미조구치의 심리흐름을 통해 보여주며, 절대적 미의 응집체로서 금각사를 설정합니다. 그리고 미조구치는 자신의 불완전함에 의한 고통을 보상받기 위해, 더 궁극적으로는 그의 심리 속에서 더 이상 아름답지 않은 대상을 없애고 다시 완벽한 미를 구축하기 위해, 최종적으로 금각사를 태웁니다. 그는 『금각사』에서 그가 갖는 탐미주의적 사고방식, 완벽한 미의 추구에 대한 자신의 생각 엑기스 자체를 녹여낸 셈입니다.
한편, 그는 사회적응을 위해 가면 뒤에 숨어야 하는 한 젊은 잠재적 동성애자의 고통을 묘사한 데뷔작이자 자전소설, 『가면의 고백』에서 유년 시절 조모와의 이야기, 학습원에서의 동성애 경험 등을 얘기하며 가면 속에 숨겨진 자신의 비정상적 요소에 대한 욕망, 자신의 성도착과 사디즘적 성향을 분석했다고 생전에 언급했습니다. 소설 첫머리에 도스도옙스키의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 3부 「열렬한 마음의 시」를 인용하면서 말이죠.
“이성의 눈으로는 오욕으로 보이는 것이 감성의 눈으로는 훌륭한 아름다움으로 보이다니,
과연 소돔에도 아름다움은 있는 것인가?”
미시마는 이후 자신의 병약한 체질을 단련을 통해, 다시 말해 헬창이 되면서 근육질의 건장한 몸으로 재탄생합니다. 이때부터 그는 문학적 스승이었던 카와바타 야스나리마저 어느 쪽이 진짜인지 혼란을 느낄 정도의 파괴적 변신을 하는데, 그 대표적인 결과물이 『우국』입니다.
2.26 사건을 배경으로 하여 전개되는 『우국』은 동경 근위사단 소속의 신혼 청년 타케야마 중위의 고뇌를 보여줍니다. 천황을 위해 쿠데타를 일으켰으나 천황에 의해 반역자로 규정되어 총살형에 처해질 황도파 청년 장교들의 처지를 통탄하며, 자신이 곧 동료들을 근위사단 진압군으로서 족쳐야 하는 처지를 한탄하며, 타케야마는 그의 아내와 ‘뜨거운 순간’을 보낸 뒤 군복을 갖춰 입고 할복자살을 합니다.
그러나 그 속에서도 그는 미학을 찾으려 시도합니다. 단지 좀 색다른 관점에서 말이죠. 그는 할복 과정을 매우 자세히, 한편으로는 비장미가 느껴지게 표현합니다. 어떻게 보면 그는 미학의 총람자로서 절대적 역할을 부여한 천황 앞에서 자신을 없애는 방식을 통해 천황의 일부, 더 나아가 미학의 일부가 되는 ‘성스러운 황홀’이라는 면으로 할복을 그린 셈입니다. 그가 『우국』의 장면을 현실 행위로 후에 실현한 것도 이 같은 맥락이 아니었을까요.
-물론 현실적으로 할복은 매우 고통스럽게 천천히 죽을 수 있는 모범답안 중 하나이니, 당연히 안 하시겠지만 우리 정예공군 전우님들은 절대 따라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7. 삼도의 기묘한 활동
앞서 미시마의 일생을 언급하면서 전공투와의 대담을 언급했는데, 여기서 그의 사상을 좀 더 자세히 보도록 합시다. 미시마는 제국 시절의 일본과 미군정 하의 일본, 현대 일본국을 모두 경험한 자로 그 과정에서 격변하는 일본 사회를 봅니다. 천황의 인간선언과 신민의 인간으로의 상승, 미군정 하의 고도성장, 소비자본주의 사회로의 진입과 전통적 가치보다 소시민적 행복을 중시하는 모습이 제국 해체 이후 일본에서 벌어졌고, 미시마는 이러한 모습에 불만을 품었습니다.
그에게 있어 일본국의 모습은 중심이 없는 허구이자 자본주의의 추악함을 갖춘 존재였고, 소비자본주의에 의해 소시민이 양산되고 있다고 그는 판단한 것으로 보입니다. 이러한 소시민을 바꿔 일본의 근대화를 이루는 것이 그의 목표였고, 그는 그것을 위한 초인의 메타포로서 천황을 설정하며 이질적인 천황주의자가 된 것이라 볼 수 있을 겁니다. 결국 동경대에서 한 전공투와의 토론 중 어느 전공투 단원이 했던 말처럼, 그의 세계관에서 천황은 우리가 생각하는 천황주의자의 모습과는 달리 자신의 작품이자 목적 실현을 위한 하나의 수단이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실제로 그의 우익사상은 우리가 흔히 매체로 접하는 혐오하는 인간의 형태에 불과한 우익과는 형태가 많이 다릅니다. 우리가 흔히 일본 우익의 총본산이라 보는 경향이 강한 자민당의 경우, 보수 빅텐트 성격이 강한 자민당답게 우익 민족주의자들의 집합체이기도 하지만 유산계급과 중산층의 경제적 이익 역시 대변하는 존재이게 자민당을 중심으로 하는 우익세력은 고도성장기의 일본을 ‘아름다운 나라’, ‘다시 실현해야 할 존재’로 봅니다. 그러나 미시마의 눈에는 고속성장기의 일본은 그저 추악한 소비자본주의의 결집체이자 중심이라는 것이 없는 나약한 존재일 뿐이었습니다. 근대 달성을 위한 초인의 메타포로 설정된 천황 아래의 일본제국 헌법이 그리하였듯, 군 통수권을 천황이 가지고 근대사회달성의 필요조건으로서 공화제와 언론의 자유가 있는 사회가 미시마가 만들고 싶었던 사회였다고 합니다.
또한 그는 무사도의 관점에서 군국주의를 비판했다는 점에서 그만의 특징을 갖는데, 그는 ‘개개인이 대등한 관계에서 죽음을 무릅쓰고 일대일 대결을 하는 것’이 무사도이며 군국주의는 개개인이 대등하지 아니하고 일대일이 성립하지 않기에 군국주의 역시 이상적인 모습이 아니라 비판합니다. 이런 점에서 그는 우리가 생각하는 일제 군국주의자의 모습을 한 자는 아닌 셈입니다.
다만, 실제 무사들의 합리성, 더 나아가 술책과 계략(좀 더 노골적으로 말하면 통수치기)을 장려하는 집단이었다는 점과 절대권력과 공화제-언론의 자유가 양립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가에 대한 선례가 무수히 많다는 것을 생각해 보면.............. 결국 그는 정치사상가로서라기보다는 탐미주의의 과정으로서 정치사상에 접근한 인물이라고 볼 수 있을 겁니다. 그렇기에 그는 그 과정에서 발생한 실질적 모순을 극복할 대안을 제시하진 못했죠.
8. 몸이 참 죽여주는군요
그는 지속적인 신체단련(이라고 쓰고 헬창이 된다고 읽는 행위를 통해) 건장한 체격을 만드는 데에 성공합니다. 생전에는 『장미형』이라는 사진집을 낸 적도 있었는데, 여기서 그는 자기 육체에 대한 자신감을 과시해 보입니다.. 대부분의 사진이 탈의한 형태로, 훈도시 걸치고 일본도 들고 있거나 나무에 매달려 화살 맞는 장면인데, 확실히 자신의 신체에 대한 자신감이 있었으니 그런 행동을 하지 않았을까요.
단지 그에게 불행한 사실이 있었다면, 그가 170cm이 안 되는 단신이었다는 것과 운동신경이 정말 지독하게도 안 좋아서 뭔 운동을 해도 매우 뻣뻣하다는 인상을 지우기 힘들 수준이었다는 것이었죠. 최종적으로 검도 5단에 거합도 1단이었다고 하는데, 이 정도로 올 만큼 수련하면 어지간해서는 자연스럽게 될 법도 할 텐데 지독히도 부자연스러운 모습을 보여준 것을 보면 (너튜브를 찾아보시면 그가 검도 1단 동작을 시연하는 영상이 있습니다.), 저주받은 운동신경이라고밖에 설명할 길이 없어 보입니다..
그리고 항상 나오는 의혹. 나무에 매달려 화살 맞는 장면을 담은 사진 때문에 꾸준히 제기되는 의견, 그가 게이였다는 것입니다. 이 나무에 매달려 화살을 맞는 모습은 성 세바스티아누스의 순교 장면에서 나온 건데, 이 세바스티아누스가 왜인지 모르게 SM 플레이에서 게이물의 클리셰처럼 쓰이는 바람에 그가 게이가 아니냐는 의혹이 꾸준히 제기되곤 합니다. 자전소설 『가면의 고백』에서도 성 세바스티아누스의 순교 장면을 담은 성화를 보고 정신 및 육체적으로 최초의 절정을 경험했다고 한 것 때문에 의혹은 더 커졌는데, 의혹은 의혹이니 본인만이 진실을 알 겁니다. 단지 추측한 바가 그렇다는 거죠.
작년에 미국에서 그가 죽기 1주일 전까지 촬영하다가 그가 사망한 뒤 출판이 무산된, 사망 50주년을 기념해 만든 사진집이 나왔다고 합니다. 『The death of a man』이라는 제목을 달고 죽음을 테마로 해 본인이 직접 기획하고 모델로 출연했다고 하더군요.
9. 똘끼 충만한 어느 어엿쁜(?) 천재
그런 그에 대해서는 어떻게 평가를 내려야 할까요. 과거 세대까지만 해도 그의 천황주의적 면모와 그의 할복소동 덕에 그냥 ‘미친 놈’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닌 평을 받았습니다만, 저는 단순히 그렇게 봐서는 안 되는 인물이 미시마였다고 봅니다.
혹자는 그에 대해, 특히 그의 죽음을 두고 이렇게 평가하기도 합니다. 전후 냉전구도에 의해 청산되지 않은 망령이 돈키호테마냥 날뛰다가 세상으로 튀어나온 해프닝이라고 말입니다. 그러나 ‘그는 단순한 군국주의 망령이었을까’라고 한다면 그건 아니라고 봅니다. 그는 어디까지나 자신만의 미학을 찾고자 시도했고, 미학이라는 관점에서 모든 것을 본 사람일 겁니다. 어떻게 본다면 그는 『광염소나타』에 등장하는 백성수의 마일드한 버전이랄까요. 살인이나 범죄라는 요소를 그의 특이한 사상과 자기살해라는 요소로 교체한다면 말이죠. 그리고 자신만의 철학을 증명해 보이기 위해 전공투와의 대담이라는 대담한 행동을 하기도 하고, 생각과 육체는 분리되지 않았음을 증명하기 위해 육체와 칼로 세상을 초월하려 시도했었죠. 그런 행동의지 자체만큼은 그도 나름 재평가받을 여지가 있다고 봅니다.
그러나 그는 미학의 관점으로만 모든 것에 접근하면서 정치사상의 요소와 실제 역사가 보여준 과거, 그리고 자신의 미학관과 정치사상의 충돌로 발생한 모순을 극복하거나 해결책을 제시하진 못했습니다. 결국 제국의 신민을 벗어나지는 못한 존재가 된 셈이고, 『금각사』의 미조구치와 달리 그는 미학을 추구하다가 스스로를 살해하는 길을 택했습니다. 그리고 제국의 이면에 있는 요소, 제국을 유지하기 위해 불가분적인 요소로 엮여 관이 꽂혀 체액이 빨리는 존재들을 생각해 본다면, 그 제국이 어떻게 파멸에 이르렀는지를 생각해 본다면 ‘겪어보지 않은 자에게 전쟁은 아름답다’는 말이 떠오르는 인물이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물론 저와 다르게 생각하시는 전우님들도 계실 거라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결국 평가는 각자의 몫이니까요. 이 점에 대해서는 전우님들이 앞에서 제가 한 말을 토대로 본인의 가치관을 가지고서 판단해 보는 것이 이상적일 것 같습니다.
글이 참 길었군요. 이 글이 마지막이 될 거라는 생각에 제 손이 아쉬움을 조금이라도 풀어보려고 열심히 펜을 굴린 게 아닐까 싶습니다. 그동안 30편이 넘는 글을 쓰면서, 소재를 찾아 헤매며, 열심히 비번 시간 쪼개며 쓰던 모습이 떠오르지만, 제가 이렇게까지 할 수 있었던 것은 다 제 글을 읽어주시는 전우님들이 계셨기 때문에, 제 글에 관심을 가져주셨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처음에는 ‘나도 써볼까’라는 생각에서 출발하다가, 일병시절의 거지 같음을 조금이라도 잊어보려고, 이 안에서만큼은 내 자유대로 쓸 수 있으니까, 나중에는 재미가 들려서 등등 계속 써오는 이유는 변해왔습니다. 다만 언제나 글을 쓰면서 질 높은 글을 쓰고자 노력해 왔습니다.. 물론 그 결과물이 맘에 안 드는 분들도 계셨을 거라 믿습니다. 그러나 여러분들의 관심이 있었기에 제가 지금까지 연재 아닌 연재를 해왔고 그리 할 수 있었다는 것 역시 사실입니다.
저는 이제 오프 이후, 미복귀 출타할 예정입니다. 이제 제 국방부 시계가 다 멎어갑니다. 마침 나가는 날이 헌병의 날이던데, 이게 무슨 운명의 장난일까요?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이 말 한마디를 꼭 하고 싶었습니다. 저는 이제 떠나지만, 앞으로도 휴머니스트에 저보다 좋은 글을 많이 써주실 전우님들이 계속 들어올 거라고 생각합니다. 언제나 제 글을 읽어주셔서 감사하다는 말과 함께, 그럼 군사경찰 병장 ***은 이만 물러가보겠습니다. 항상 감사했습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THE E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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