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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명랑하고 유쾌한(?) 호엔촐레른 가 사람들 _1 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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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UMAN H 2023. 12. 22. 0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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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과거 이 블로그의 주인장 되는 사람이 현역으로 군복무하던 시절, 인트라넷 카페 <휴머니스트>에 작성한 글을 복원한 것이다. 다만, 당시 글을 쓸 때는 지금처럼 인터넷에 마음대로 접근할 수 없어 머리 속에서 생각한 것과 기억에 의존해 글을 쓰다 보니, 사실관계가 맞지 않거나 숫자에서 오류가 있어 이러한 부분은 수정하였고, 다시 글을 읽으면서 발견한 비문과 논리구조 상의 오류 역시 고쳐 이 블로그에 올린다.

당시 내가 쓴 글에 관심을 갖고 읽어준 모든 이들에게 감사함을 담아, 그 당시 나와 함께 동고동락한 동기들을 생각하며 이 글을 다시 백업한다.

 

전우님들, 안녕하십니까. 여전히 죽지 못해 사는 어느 평범한 군사경찰입니다. 참 오랜만에 에어위키에 다시 등장하는군요. 그동안 쓸 여건이 안 돼서 수기식으로 쓰던 거 이제야 올립니다. 아직 죽지는 않았는데, 죽은 것처럼 보인 점에 대해서는 양해 부탁드린다는 말과 함께 다시 복귀해볼까 합니다.

이번에는 뭘 쓸지 고민하다가, 과거 호레이쇼 넬슨에 대해 썼던 글에서 말한 역사 속 인물에 대한 가면 벗기기(?) 2탄을 해볼까 합니다. 이번 글의 주제는 독일제국의 황제였던, 참으로 명랑한(?) 호엔촐레른 가문 사람들의 개인적 면모입니다. 사실 제 동기가 요청한 주제가 있긴 한데, 그걸 제가 차일피일 미루고 있다 보니 빨리 안 쓰냐고 욕먹고 있습니다. 그건 제가 조만간 작업해서 올리도록 하죠. 그것도 할 말이 워낙 많아서 시리즈물이 될 듯합니다. 그러니까 좀만 기다려도, !!

 

빌헬름  1 세 (1797~1888)

 

*빌헬름 1(1797~1888)

 

호엔촐레른 왕조 브란덴부르크-프로이센 왕국의 7대 국왕, 북독일연방 의장, 독일제국 초대 황제이자 독일제국군 총사령관을 역임한 빌헬름 1세는 상기한 바와 같이 역임한 지위가 하나같이 굵직한 인물입니다. 그만큼 장수한 인물이기도 하죠. 1797년에 태어나 1888년에 죽었으나 무려 90세를 살고 간 인물인데, 당시 유럽의 상황으로 보면 그는 19세기 유럽사의 순환을 다 보고 간 역사의 산증인 중 하납니다. 나폴레옹 1세 시절의 프랑스, 체제를 다시 혁명 이전으로 돌리려 한 빈 체제 하의 유럽, 신흥강국 독일제국의 등장과 산업혁명을 모두 본 어마무시한 인물이 바로 빌헬름 1세였습니다.

 

그만큼 세월의 풍파를 온몸으로 받아온 인물이었던 만큼, 빌헬름 1세는 엄청난 초보수주의자이자 왕권신수설 신봉자이기도 했습니다. 독일통일 전쟁 당시 비스마르크가 민족주의를 자극해 슐레스비히-홀슈타인 전쟁에서 덴마크를 삽시간에 털어버렸을 때, 빌헬름 1세는 이를 그닥 마음에 들어하지 않았는데, 그 이유는 다름이 아니라 민족주의를 자극했다는 것 때문이었습니다. 그에게 있어 왕권을 신이 내린 신성불가침의 영역이었기에, 민족주의를 포함한 일체의 정치사상은 천한 것들의 상스럽고 불순한 사상(...)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습니다. 그러니까 그냥 정치사상을 갖는 거 자체를 금기시한 것이죠.

다만 그런 그라 해도 깨는 면모를 가지고 있었는데......

 

 

1. 나는 왜 결혼하지 말라는 선배들의 충고를 무시해가지고......

 

강력한 왕권신수설 신봉자에 초보수주의자, 최종적으로는 독일제국의 황제가 되고, 그 과정에서 전통적인 유럽의 강국 오스트리아와 프랑스까지 찍어누른 빌헬름 1세 앞에 그를 막을 수 있는 존재는 없어 보였으나...... 유일한 적이 하나 있었습니다.

 

독일 제국 빌헬름 1세의 황후, 아우구스타 마리 루이제 카타리나(Augusta von Sachsen-Weimar-Eisenach)

 

다름 아닌 그의 아내, 아우구스타 황후였죠. 아우구스타 황후는 장난 아닌 여자였는데, 그 이유는 그녀가 천부적인 말빨의 소유자였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녀는 타고난 말빨에 더해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시비 걸기와 트집 잡기 능력을 가진 인물이었습니다. 사실상 평소 생활에 있어 말싸움할 때만큼은 그녀가 빌헬름 1세의 유일한 적이었죠. 그렇다고 황제씩이나 돼서 마누라한테 주먹질을 할 수도 없고, 대항을 해도 소용없고, 항상 얻는 결과는 빌헬름 1세의 혈압상승이었습니다. (...) 그럼 이 유일한 적을 상대하는 방법은 뭐였을까요? 빌헬름 1세는 지극히 원론적이면서 단순한 해결 방법을 가지고 나옵니다.

 

바로 혈압상상의 직접적인 원인과 접촉을 안 한다’, 다시 말해 황후와 직접 얘기를 안 한다였습니다. 황후와 직접 얘기를 안 하되 정말 해야 할 말이 있다면 미리 선발해놓은 궁정 하인 하나를 통해 그를 메신저로 이용하는 삶을 택한 것이죠.

다만 이 방법도 그닥 효과적이진 않았나 봅니다. 메신저를 이용한 대화에서도 부부의 말싸움은 계속 오갔거든요. 여전히 험악한 분위기 속에서 언성은 높아지고 육두문자만 안 섞었다 뿐인 대화가 오갔습니다. 단지 이 말이 뒤에 추가되었을 뿐이었죠.

 

“-라고 황후께 전하거라“-라고 황제께 전하거라

 

메신저 역할을 맡은 궁정 하인들은 황제와 황후의 명령 때문에 항상 이 말싸움을 강제 관전해야 했고, 말이 점점 험악하게 오갈 때마다 하인들은 두려움에 떨어야만 했습니다. 도대체 하인들은 무슨 죄였을까요?

 

 

 

2. 전하, 군대 문제는 함부로 건드는 거 아닙니다!

 

예나 지금이나 남자들에게 군대 문제만큼 민감한 게 또 없습니다. 특히 그걸 몸으로 체감하는 징병제 국가라면 더 말할 나위 없죠. 그리고 과거 프로이센은 군대를 보유한 국가가 아니라, 군대 안에 프로이센이라는 국가가 있다는 조롱 섞인 평가를 받을 만큼, 군대에 목숨을 건 프로이센도 징병제 국가였습니다. 프로이센의 군 복무기간은 2년이었습니다. 적어도 1856년 이전까지는 말이죠.

1862, 왕위 계승 1년 차 빌헬름 1세는 이 문제로 역사를 바꾸는 결정을 하게 됩니다. 바로 오토 폰 비스마르크를 정계로 끌어들인 것이었죠. 그를 정계를 끌어들인 이유는 바로 아까까지 언급한 문제 때문이었습니다.

 

....

 

아까 말한 대로 원래 프로이센의 현역 복무는 2년이었습니다. 그런데 빌헬름 1세가 자신의 형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가 병으로 오락가락하던 때에 잠깐 섭정으로 들어간 시기가 있었는데, 그 당시 복무기간을 슬쩍 3년으로 만든 것이었습니다. 이 때문에 하원이 1862년에 반발하고 나섰죠. 이 당시는 복무기간 문제뿐만 아니라 군제개혁 문제까지 겹치면서 훗날 헌법 투쟁이라고 불릴 만큼 문제가 커지게 되었는데, 핵심 문제는 복무기간과 예비군의 지휘권 문제였습니다. 흔히 세금 증액 때문에 하원의 주요 구성원들이었던 부르주아 계층이 반발한 것으로 알려졌는데, 현실을 이와 조금 다릅니다. 인구 증가에 따른 병력증가 때문에 군에 배분되는 세금 증액은 부르주아들도 필요한 것이라고 보고 있었죠. 문제는 예비군을 예비군 장교가 지휘하던 것에서 현역 장교가 지휘하게끔 하는 법률 개정과 은근슬쩍 늘려놓은 군 복무기간이었기에, 부르주아들이 반발하고 나선 겁니다. 사실 당시 육군장관이었던 알브레히트 폰 론(Albrecht von Roon, 1803~1879)전하, 그래도 이 문제는 어느 정도 협상의 여지가 있으니 적당히 타협을 보시는 게 어떻겠습니까?’라고 설득하는 상황이었지만...... 초보수주의자 빌헬름 1세는 협상의 여지 따위는 없는 아주 확고한 꼰...아니 남자였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하죠.

 

아니, 솔직히 2년 가지고 되나? 3년 정도는 해야 병사 개개인도 전쟁에서 좀 쓸만하게 되고 나에 대한 충성심도 생기지! 그리고 예비군도 엄연히 군인 아닌가. 현역한테 지휘받게 하는 게 뭐 문제 되기에 경까지 저것들 편들고 그러는겐가? 내 이번 문제에 내 왕 자리를 걸겠네.”

 

알브레히트 폰 론 원수는 프로이센군의 현대화를 이끈 인물이자 보오전쟁 당시 독일 통일에 공헌한 인물이었다. 이 때의 공로로 그는 흑독수리 훈장을 수훈하였다.

 

협상의 여지 따위는 없다는 식으로 나오는 빌헬름 1. 결국 하원은 의회가 쓸 수 있는 유일한 무기를 발동합니다. 바로 예산이죠. 예나 지금이나 돈 앞에서는 장사 없습니다. 의회는 군에 지급할 예산에 이의를 제기해 예산 승인을 불허하는 식으로 나왔고, 결국 빌헬름 1세는 버럭 성질을 냅니다.

 

야 이 x자식들아, 내가 왕이지 니들이 왕이야?! 더러워서 못 해먹겠네.

나 퇴위하고 내 아들한테 양위할 거니까 그런 줄 알아!”

 

이런 식으로 성질을 부린 빌헬름 1, ‘너네들이 그런 식으로 나온다면 나도 무기가 있지라는 심정에서였던가, x몬 사냥해오듯이 몬스터볼 들고 러시아로 가 초보수주의자 외교관 하나를 잡아옵니다. 그 외교관이 바로 비스마르크였죠.

물론 빌헬름 1세가 개인적으로 비스마르크를 좋아했느냐고 묻는다면...... 정치적으로 그를 믿은 것과 인간적으로 하는 신뢰는 별개 문제입니다.(...) 오히려 빌헬름은 비스마르크를 좋아한 적이 없었죠. 단지 정치적으로 그가 유능한 인물이었고, 어디까지나 자기 기준에서 꼴 보기 싫은 자유주의자들 찍어누르는 데에는 뜻이 같아 보이니 쓸만하다 판단해 그를 계속 기용한 겁니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국익에 필요하다고 여겼기에, 간섭을 최대한 안 한 것에 가까웠죠.

 

 

3. 제국의 황제 자리를 거부한 왕이 있다?!

 

빌헬름 1세의 직위 중 하나는 독일제국 초대 황제입니다. 다만 그는 우리의 관점에서 봤을 때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합니다. 바로 처음에 황제 자리를 거부했다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그의 유일한 관심사는 프로이센과 군대뿐이었고 독일 민족의 통일에는 관심 따위 1도 없는 인물이었다고는 하지만, 언뜻 보면 이해가 안 갈 겁니다. 실제로 그가 황제로 즉위한 것도 자신의 절친이었던 바덴 대공이 직접 그를 설득한 것과 더불어 즉위식 당일 아침에 이미 30여 개국 군주들이 모두 와 있는 상황이었기에 어쩔 수 없이 황제로 즉위한 것이었고, 즉위식 당일 아침에도 즉위를 축하한다는 인사를 건넨 외빈들에게 이렇게 말했죠.

 

나는 제국의 황제 따위 관심 없소. 그게 다 무슨 소용이란 말이오?

나에게 중요한 건 오직 프로이센, 프로이센뿐이란 말이오!”

 

그리고 독일 통일의 일등 공신이자 주인공 비스마르크에게는 이렇게 역정을 냈죠.

 

경 때문에 프로이센의 장례식을 치르게 생겼소!”

 

그런데 그가 이런 이해할 수 없는 행위를 한 데에는 이유가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제국의 황제 자리를 외국 군주가 오면 의전상 수여하는 훈장처럼 부여하는 왕실 근위연대 명예 대령에 불과하다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사실 이런 생각이 이상하진 않다고 여길 이유가 예 없지도 않은 것이, 과거 신성로마제국이 갖는 실권과 권역의 괴리, 그리고 18세기 부르셴샤프트 운동 당시 파울 교회에서 모인 자유주의-민족주의자들이 황제 추대를 하려다가 내분과 실질적 권력의 부재로 인해 결국 실패한 사건 등을 직접 본 사람이 빌헬름 1세였다는 것을 감안한다면...... 그의 이해할 수 없는 행동도 마냥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은 아닐 겁니다. 물론 그렇다 해도 황제 자리를 마다하는 것만큼, 희한한 행동은 또 없을 거라는 것은 안 변할 겁니다.

독일제국 선포식을 묘사한 기록화이다. 공식적인 주인공은 빌헬름 1세였지만, 그림에서 볼 수 있듯이 유달리 돋보이는 백색예복을 입고 있는 비스마르크의 모습은 독일제국 성립의 진짜 주인공이 누구였는지를 보여준다. 비스마르크가 실제로는 흑색 예복을 입고 있었지만 기록화에서는 백색예복을 입은 것처럼 그려진데에는 빌헬름 1세의 명령이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프리드리히 3(1831-1888)

 

재위 기간이 99일이었던 독일제국 2대 황제였던 프리드리히 3세는, 본인의 짧은 재위 기간과 더불어 초대 황제 빌헬름 1세와 네임드급 인물이었던 그의 아들 빌헬름 2세 덕에 묻히면서 잘 안 알려진 인물이긴 합니다만, 대체 역사에서 가장 많이 나오는 인물이라는 점에서 흥미로운 인물이기도 합니다. 그의 아들 빌헬름 2세가 앞뒤 생각 안 하고 일을 벌이다 소탐대실해버렸던 결과를 낳은 인물이었던 만큼, ‘그와는 반대 성향을 가진 프리드리히가 정상적으로 황제 자리에 있었다면 아마 역사가 이렇게 되지 않았을까?’라는 상상 하에 만들어지는 대체 역사에서는 프리드리히 3세 치하의 독일제국이 항상 등장하죠. 그럼 이런 프리드리히 3세는 과연 어떤 면모를 가지고 있었는지 보도록 합시다.

프리드리히  3세  (1831-1888)

 

1. 전쟁과 평화

 

 전쟁과 그의 평소 정치적 성향을 고려해보면 정말 모순 그 자체라는 생각이 들곤 합니다. 어쩌면 현실정치 그 자체를 보여준다고 볼 수 있을 겁니다.

 프리드리히 3세는 황태자 시절, 정확히 말하자면 세자 시절을 본(Bonn) 대학에서 보냅니다. 그리고 대부분 유럽의 차기 군주 후보들이 그리했듯 대학에서 역사학, 법학, 공공정책학, 통치학을 배웁니다. 당시 독일 대학의 특성이라면 국가가 주도하는 인재 육성도 있었지만, 국가로부터의 자유 속에서 배우는 자유로운 사고와 의사 표현 역시 있었습니다. 프리드리히는 후자의 성향을 강하게 받았고, 특히 본 대학의 자유로운 사고를 중시하는 학풍의 영향까지 받아 그는 리버럴한 사고를 갖게 됩니다. 완고한 보수주의자였던 부왕은 아들의 이러한 사고를 어떻게 생각했을지는 저도 참 궁금하군요.

 대표적으로 프리드리히 3세의 자유주의적 사고를 보여주는 사례는 반유대주의 비판과 헌법개정 시도를 들 수 있습니다. 독일제국 성립 이후 슬슬 대가리를 디밀던 유대인 차별 운동에 공개적으로 비판 성명을 내고, 그는 아내 빅토리아 아델레이드 메리 루이자와 함께 시나고그(유대교 회당)를 방문했었죠. 또한 영국식 의회제도 도입을 적극 시도하면서 외치에서와는 별개로 내치에서 반대파를 찍어누르는 비스마르크를 제어해보기 위해 헌법개정을 시도하기도 합니다. 황제에게만 정치적 책임을 지는 제국총리에게, 제국의회도 총리에게 책임을 물을 수 있게 하려는 헌법개정은 비록 실패하지만, 프리드리히 3세의 성향을 잘 드러냄과 동시에 대채역사가들과 소설가들에게 상상의 나래를 펼칠 자극제같은 면모였을 겁니다.

 

 그런데 이렇게 평화와 화합, 자유주의의 화신 같아 보이는 그였지만, 전쟁터에서는 아주 딴판으로 변합니다. 아주 날아다니며 맹활약을 펼치죠. 물론 과거 중세 전쟁터에서와 같이, 직접 갑주 차고 필마단검으로 적진을 향해 돌격하며 무쌍을 찍진 않았지만, 그는 뛰어난 지휘관으로서 능력을 발휘하며 독일 통일을 가로막는 적들을 마구 갈아버립니다. 어떻게 보면 그는 프로이센이 원했던 군주의 상, 조금 더 정확히 말하자면 프리드리히 대왕의 면모를 가진 게 아닌가 싶습니다. 계몽군주이자 강력하고 유능한 군사지휘관이라는 점에서 말이죠.

 프리드리히 3세는 슐레스비히-홀슈타인 전쟁에서부터 보불전쟁 때까지 그 어렵다는 세대 간의 통합을 달성합니다. 나이 많은 고급 장교들과 참모진의 경험, 젊은 일선 장교들의 혈기를 엮어서 적을 갈아버리는 데에 성공한 겁니다. 솔직히 보통 대화에서도 둘을 융합하긴 보통이 아닌데, 다른 것도 아니고 결정 한 번 잘못하면 뚝배기 깨지는 전쟁터에서 이렇게 하는 건 재능+노력 그 자체가 아닐까요?

 

 

2. 이주일 씨도 그러더만, 담배 그거 독약이라고......

 

 다만 그에게도 치명적인 문제가 있었습니다. 바로 흡연이었죠. 아닌게 아니라, 프리드리히 3세는 아버지의 어마무시한 장수로 인해 56세가 되어서야 즉위한 당시에도 이미 후두암에 걸려있을 만큼 심각한 꼴초였습니다. 나이와 피워온 시기를 감안하더라도, 당시 담배의 독함과 유해성에 대한 무지를 감안해보면 솔직히 후두암 1밀리 주세요가 아니라 폐암 10그람도 쌉가능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솔직히 그렇게 시가에 불을 땡긴 지그문트 프로이트도 말년에 구강암 걸려서 인공턱 끼운 거 생각해보면, 프리드리히가 무적의 실전압축인간(...)이 아닌 이상, 그 역시 후두암이 아니라도 다른 병으로 갔을 가능성이 매우 높았을 겁니다.

 

 여하튼 프리드리히 3세는 흡연의 유해성을 몰라서였을까, 습관이 되어서였을까, 그것도 아니면 스트레스 때문에 프로이트의 말마따나 구강기로부터 비롯된 스트레스 해소 방안으로 흡연을 택한 것이었을까, 열심히 불을 붙이고 빨아댄 결과, 즉위 당시에는 심각한 후두염 환자가 되어버립니다.

 독일 진보계의 유일한 희망으로 여겨지던 프리드리히 3세는 이미 1887년부터 암 가능성을 진단받았습니다. 이미 3월에 카를 게르하르트가 실시한 코카인 국부마취 및 와이어슬링을 이용한 용종절제시술을 받은 상황이었죠. 이 당시 독일 의학계는 다음과 같은 진단을 내립니다.

 

일단 결핵이나 매독은 아닌 듯하다. 그런데 암은 확실해 보인다. 심각한 경우라면 후두개방 후 용종 제거가 필요할 것으로 보이는데, 문제는 용종 제거시 효과는 확실하지만 황태자 저하께서 목소리를 잃거나 최악의 경우에는 서거하실 수도 있다.’

 

 결국 황태자의 치료를 위해 독일 최정예 의료진이 붙게 됩니다. 여기에는 영국에서 초빙된 모렐 맥켄지(Morell Mackenzie)가 포함됩니다. 그는 영국 이비인후학계에서 존경받는 인물이자, 그가 저술한 이비인후학 교재는 당대 의학계를 선도하던 독일에서도 높은 평가를 받고 있었을 만큼 실력 있는 의사였죠. 문제는 진단의 차이 때문에 의료진 사이의 관계가 험악해졌다는 데에서 생깁니다. 에른스트 폰 베르그만을 위시한 독일 의사들은 프리드리히의 후두질환을 악성종양으로 판단했지만, 맥켄지는 이를 양성종양으로 판단했고, 둘의 의견 차이가 생각 이상으로 심각한 대립을 유발한 것입니다. 여기에 더해 당시 세계 의학-과학계를 주도하는 헤게모니 싸움과 국가 간의 대립감정까지 겹치면서 의료진 내에서는 협력은 기대할 수 없게 됩니다. 오히려 서로 공격하기 바쁜 상황이 펼쳐지고 있었죠.

 

모렐 맥켄지 (Morell Mackenzie). 그는 당대에 실력있는 이비인후과 전문의로 명성을 떨쳤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 실력으로 인해 역사의 갈림길에서 방향을 결정하는 역할과 평가를 떠맡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그의 건강은 점점 악화되어 갔습니다. 18876, 빅토리아 여왕의 즉위 50주년 기념행사로 영국을 방문했을 당시 프리드리히 3세는 젊은 시절의 활기찬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창백한 밀랍인형 같은 모습으로 말 위에 있었습니다. 이제 희망적인 관측은 서서히 설 자리를 잃기 시작했죠. 그해 11월에 되자 종양은 재발했고 크기 역시 이전과 비교해 더 커졌기에, 맥켄지도 기존의 진단을 엎고 의료진의 진단 역시 이전의 대립을 초월해 하나로 통일됩니다. 다음과 같이요.

 

저하, 이제는 방법이 없습니다. 지금 할 수 있는 건 기관지 절개술밖에 없습니다. 거듭 말씀드리는 거지만, 이제 진짜 이 방법 외에는 생명을 담보할 방법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러한 진단을 내릴 수밖에 없게 된 것이, 당시 황태자는 평소같이 숨쉬기도 힘들어하는 상황이었기 때문입니다. 천식 환자마냥 숨 쉴 때마다 나는 쌕쌕거리는 소리가 바로 옆은 물론이고 연회 테이블에서 프리드리히의 맞은편에서도 들릴 지경까지 간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완전한 용종제거는 거부하고 기관지 수술만 동의하면서 뭔가 또 꼬이기 시작했습니다. 일단 188829, 기관 절제술을 실시하고 그의 풍성한, 그러나 건강 악화로 인해 회색으로 바래버린 그의 턱수염 밑에는 인공기도가 삽관됩니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이 무색하게도 1888615, 황태자, 아니 간신히 즉위한 프리드리히 3세는 황제가 된 지 99일 만에 세상을 뜨고 맙니다. 사후 부검 결과는 다음과 같았습니다.

 

기도 및 폐 조직 괴사. 기도에서 농양 발견

 

세상을 뜰 당시의 프리드리히 3세. 활력 넘치던 모습은 사라지고 그의 턱수염 밑은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상태에 이르렀다. 그의 목숨까지 앗아갈 정도로.

 

 이 와중에 맥켄지를 추천해 의료진에 초빙한 데에 결정적 역할을 한 프리드리히 3세의 아내 빅토리아 황후는 영국 여자가 남편 잡아먹었다!’는 욕까지 들어야 했습니다. 이 당시 세계 의학계를 꽉 잡고 있던 나라가 독일이었다는 점, 영국인 의사의 진단을 듣고 황후가 수술을 미룰 것을 권유한 것이 겹친 점, 거기다 입헌군주제 국가에서 매우 치명적인 군주의 죽음이라는 결과를 가져오다 보니 당시 파장은 결코 작지 않았습니다.

 

 다만 이러한 점만 보고 맥켄지를 비난하는 것은 지극히 결과론적인 해석임을 감안해야 합니다. 당시 입장에서 보면 맥켄지가 내가 전적으로 오진한 거라고 하지 좀 말아라고 억을해 할 수도 있다는 겁니다. 사실 맥켄지의 진단방식은 당시로서는 매우 선진적이었거든요. 그는 현대적인 종양진단학 방식을 이용해 후두겸자를 이용한 생체검사로 얻은 현미경 검사 데이터를 통해 진단을 내렸고, 교차검증을 위해 당대 이비인후학의 권위자 중 하나였던 루돌프 피르호에게도 검토를 의뢰했습니다. 문제는 프리드리히의 경우와 같은 종양은 당시 기술로는 사마귀 형태의 피부조직이라고밖에 판단할 수 없는 특수한 형태였던데다, 교차검증을 담당한 피르호조차도 종양의 단서를 찾지 못했다는 것이었죠. 사실 의학 기술이 과거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발달한 현대에도 샘플조사가 갖는 본질적 한계 때문에 생체검사 시 조직세포에서 악성 세포가 발견되지 않는 경우는 생각보다 많기에, 변명의 여지는 어느 정도 있다는 겁니다. 그리고 가장 결정적인 점, 당시 프리드리히 3세의 후두암 상태는 매우 심각한 수준이었다는 것을 빼면 안 되겠죠. 현대 의사들이 분석한 결과, 설령 당시 의료진이 황후의 조언이고 황제의 요구고 뭐고 다 씹고 즉각 절제수술을 감행했다고 할지라도 황제가 살 확률은 그닥 높지 않았다는 예측이 나왔다는 것은...... 상태가 매우 심각했다는 것 외에는 더 이상의 표현이 없겠죠?

 

 사실 프리드리히 3세가 더 살았다 한들 독일사가 변했을까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합니다. 대표적으로 독일사학자 폴커 울리히(Volker Ullrich)의 반박이 그러하죠. 그는 황제의 일기를 근거로 프리드리히 3세가 흔히 생각하는 바와 같은 확고한 변혁 의지를 갖추지는 않았다고 평가하며, 그가 바란 정체(政體)는 사실 흉내낸 민주주의에 상부에 집중된 권력국가 체제를 혼합한 것일 수도 있었다고 분석했습니다. 다만 그의 아들 빌헬름 2세와 그의 치세 동안 집권한 총리들을 생각해본다면, 그가 진보 진영의 희망을 실현시켜 줄 수 있는 인물이었으리라는 예측도 무리는 아니라고 봅니다.

 

 1년이 넘게 장기화된 코로나 때문에 병 하나가 세계사를 바꾸는 게 그리 놀랍다는 생각이 들지 않은 상황에서 질병이 바꾼 세계사의 예시를 적고 있자니 기분이 묘하군요. 다음 편에서는 호엔촐레른가의 유명인 중 하나이자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빌헬름 2세에 대해 얘기하는 것으로 돌아올까 합니다. 그럼 오늘도 변변찮은 글을 읽어주신 전우님들께 감사 인사를 올리며 저는 물러가보겠습니다. 그럼 이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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